보험사는 조건 없는 상품 출시와 가입 문턱 낮추기는 사실상의 ‘배임’이라며 맞서고 있다. 관건은 현재 보험개발원이 진행하는 고위험 직군에 대한 보험료율 재분류 작업이다. 하지만 개발원도 그간 경험치를 토대로 요율을 산출하기 때문에 일반 가입자와 비슷한 수준의 보험료로 낮추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해 정부는 별도의 예산을 책정해 직무상 발생하는 고위험 보장보험료의 50%까지 추가 지원할 방침이었지만 해를 넘기면서 예산 문제 등에 발목이 잡혀 제자리걸음이다.
◇당국 “보험가입 거부 보험사 명단 공개”
금융감독원 한 관계자는 11일 “보험사에 고위험 직업군에 대한 객관적인 보험 심사 기준을 마련해 도입하도록 권유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며 “제도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보험사별로 고위험 직군 보험 가입 현황을 올해 말에 공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특정 직업군의 보험가입을 거부하는 것은 차별이니 개선하라”며 금융당국과 보험사에 권고했다. 이후 금감원은 보험사가 적극적으로 상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상해위험등급을 상향 조정하는 방법으로 고위험 직군의 위험률 조정을 유도했다.
이 관계자는 “직업별 사고 통계 집적·관리 방법을 개선하고 보험사의 청약서에 직무위험 평가를 위한 객관화된 항목을 신설하도록 보험사에 전달했다”며 “반년 넘게 권유와 협의가 이어졌으나 현재까지 고위험 직군을 위한 심사 기준을 다듬거나 마련해 내놓은 보험사는 없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소방관은 직업별 상해위험등급 ‘D등급’으로 분류돼 보험 가입이 거절됐다. 금감원 조사 결과 보험사가 단순히 ‘위험한 일을 할 것’이라고 추정한 탓에 지난해 4월 말 기준 생보사 7개와 손보사 19개사 등 26개사가 보험 가입을 거절했다. 실제 가입하더라도 높은 손해율을 이유로 일반 가입자에 최소 2배 이상 비싼 보험료를 내야 했다.
◇보험사 “강압적인 제도 개선은 배임”
보험업계는 일반 가입자와 똑같은 수준으로 고위험 직종의 보험가입을 유도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날뿐더러 일반 보험가입자에 대한 ‘배임’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일반 직업군 보험 가입자의 부담이 커지는 문제가 발생해서다. 고위험 직군의 보험가입이 늘면 전체 보험료가 상승할 여지가 있다. 특정 위험에 대한 부담을 여러 사람이 나누는 보험업의 특성 때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같은 보험료로 고위험군이 가입하면 위험도가 낮은 보험가입자에게 보험료 부담을 전가할 수 있다”며 “통계 부정확성 등으로 예측성이 떨어지면 장기적인 보험상품 판매나 운영도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영국, 독일, 미국, 일본 등도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직업의 위험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보험료를 차등하거나 보장금액 제한, 가입거절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민간 보험사에 강요하기보다는 정부나 기업의 역할을 강화해 단체보험 가입을 확대하거나 정책성 보험 도입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규동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위험직종 종사자의 보험가입 활성화를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가 지원하는 단체보험 확대와 정책성 보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재원조달·직종 재분류 ‘산 넘어 산’
우선 고위험 직업군의 ‘비싼 보험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다. 보험 가입자의 손해 위험이 크면 보험료도 높은 게 현실이다. 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것과 보험료 인하는 별개의 문제다.
금감원 관계자는 “비싼 보험료를 고려해 일부러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당사자도 상당할 것”이라며 “직업적 이유로 보험 가입에서 거절되는 고위험 직군에 대해서는 민간 영역에만 강제할 수 없어 부담을 낮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험개발원은 올 상반기까지 재분류 작업을 통한 참조요율을 내놓을 계획이지만 고민스러운 눈치다. 예를 들어 경찰관도 강력범을 다루는 형사와 내근하는 경관의 직무 위험도가 다른데 이들에 대한 보험료를 차별화하는 것은 오히려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예산 마련도 해를 넘기면서 흐지부지하고 있다. 국회와 금융당국은 소방공무원의 재해사고를 보장하는 별도의 전용보험 개발 판매를 위해 입법방안과 예산 조달을 논의 중이다. 직무상 발생하는 고위험 부분은 정부가 보험료의 50%까지 추가로 지원할 방침이지만 추가 예산 책정을 두고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에서 난색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