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출신 연출가 겸 극작가 쿠헤스타니 신작
여성 인권 운동·유럽 난민 문제 등 다뤄
실황 영상 활용한 무대 연출기법 눈길
"국적불문 모두가 생각해볼 이야기 담아"
| (사진=세종문화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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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현식 기자] 무대 위 두 남녀 배우가 숨을 헐떡이며 달린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이어지는 왕복달리기. 이는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자 자유를 향한 갈망의 질주다.
유럽 공연계가 주목하는 이란 출신 연출가 겸 극작가 아미라 레자 쿠헤스타니의 신작인 다큐멘터리리 연극 ‘블라인드 러너’가 한국에 상륙했다. 이란의 ‘히잡 시위’를 비롯한 여성 인권 운동, 유럽의 난민 문제 등을 다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아시아 초연으로 공연 중이다.
‘블라인드 러너’는 작품은 감시 카메라로 둘러싸인 감옥 면회실에서 마주하는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티격태격하며 지루한 말다툼을 이어가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는 국가 부패, 경제 불안정, 억압적 정권 등에 맞서 싸우는 이란인들의 투쟁과 독재정권과 빈곤으로부터 도망치는 난민들의 현실이 녹아있다.
| (사진=세종문화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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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및 연출을 맡은 쿠헤스타니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의문사한 쿠르드 여성의 사망 사건을 다룬 기자 닐루파 하메디와 그의 남편이 겪은 실화를 이번 작품의 모티브로 삼았다.
1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취재진과 만난 쿠헤스타니는 “픽션(fiction)과 팩션(Faction)의 경계가 얕은 작품”이라며 “대본 초고는 다섯 페이지뿐이었는데 마치 천일야화가 만들어지듯이 이야기를 덧붙여나간 끝 작품을 완성했다. 해석은 관객이 어떤 상상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아비뇽 페스티벌, 베를린 페스티벌 등 유럽의 주요 공연예술 축제 무대에 오르며 입지를 다진 쿠헤스타니는 ‘1월 8일에 당신은 어디 있었는가?’(2009), ‘청각’(2015) 등의 작품을 일본과 홍콩에서 선보인 바 있다. 국내에선 극단 코끼리단보가 2020년 쿠헤스타니의 ‘구름 한 가운데’를 기반으로 한 공연을 올렸다. ‘구름 한 가운데’ 역시 난민 문제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었다.
처음으로 직접 국내를 찾아 원작 배우들이 펼치는 공연을 올리는 쿠헤스타니는 달리기를 소재로 자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면서 “난민 문제는 특정 국가에만 국한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한국 관객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극중 남편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시각장애인 여성 파리싸의 가이드 러너를 맡게 되면서 뜀박질을 하게 된다. 아내는 세상 밖으로 나갈 날을 꿈꾸며 감옥의 복도를 트랙삼아 달린다.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는 각각 남편과 아내를 연기하는 아이나즈 아자르우슈와 모하마드 레자 후세인자데 단 두 사람뿐. 아내 역을 맡은 배우는 눈을 감은 채로 파리싸 역까지 소화하며 1인 2역으로 관객과 만난다.
| 연출가 쿠헤스타니(사진=세종문화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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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내가 달리는 모습은 무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송출된다. 두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표정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블라인드 러너’는 실황 영상과 무대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는 쿠헤스타니 특유의 연출 기법, 이른바 ‘연극화된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쿠헤스타니는 영화 작업도 꾸준히 이어왔고, 영화 ‘온당한 수용’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바 있다.
쿠헤스타니는 자신의 연출 기법에 대해 “리얼리티와 버추얼리티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며 “SNS에서 익히 봤을 법한, 저항 운동에 관한 뉴스 미디어 형식을 연극에 차용하기 위해 영상을 활용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러너’는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퍼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 24’를 통해 오는 21일까지 공연한다.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없이 60분이며 한국어 자막을 제공한다. 18일 열린 첫날 공연은 전석 매진돼 작품을 향한 국내 관객의 관심을 실감케 했다. 세종문화회관은 19일 쿠헤스타니와 번역가 이단비가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를, 20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구기연, 언론인 알파노 시나씨가 함께하는 강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