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년 조선 광해군 6년 조정이 고민에 빠졌다. `칠서(七庶)의 옥`이란 역모 사건을 수사할 때였다. 오언관과 이여순이 잡혀 왔다. 역모와는 관계가 없었으나 수사 도중 이들 두 남녀의 행위가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양반집 부녀자인 이여순이 외간남자인 오언관과 산천을 유람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됐다. 이여순을 문책해야 하느냐를 두고 조정은 시끄러웠다. 대신들은 목소리를 높였으나 광해군 생각은 달랐다. 간통의 근거가 명확치 않다는 판단이었다. 이여순은 사면됐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것은 사건보단 배후다. 사료대로라면 남녀 구분이 칼 같던 조선에서 혼인한 여성이 남편친구와 학문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다음 경우는 어떤가.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이따금 머리 들어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떠 있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신사임당이 남긴 시 한 수다. 그가 친정에 다녀가면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친정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잠깐 다니러 간 그 길에 생겼다는 건가. 아니다. 신사임당은 혼인한 지 근 20년만인 서른여덟에야 비로소 친정을 떠났다. 이 시가 지어진 건 바로 그때다.
신사임당은 친정인 강릉에 38년을 머물렀고 서울에선 10년을 산 것으로 돼 있다. 며느리보다 딸로서 오래 산 것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중반은 현모양처의 토양조차 조성되지 않았다. 시집을 전제로 자식과 남편을 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여기서 당시 혼인관행을 엿볼 수 있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여자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남자는 본가와 처가를 주기적으로 오가는 형태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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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있는 저자가 전하는 조선의 `색다른` 가족상이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달랐다는 거다. 17세기 이전까지 딸은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상속재산을 결혼 후에도 관리했다. 칠거지악? 말은 있었으나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령 큰 죄로 몰렸던 자식을 못 낳는 문제조차 `양자`로 해결됐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은 “꽉 막힌 남성 중심 사회가 아니었다.”
`장인 집(장가)에 든`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풍습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를 깨뜨린 건 중국 바람이다. 부계 위주 문화가 선진적이란 인식이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여인의 숨통을 조이는 시집살이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딸이란 정체성이 며느리로 바뀌는 순간 가족의 역학관계는 적잖은 변화를 겪는다.
`천 개의 표정`은 표현 그대로 천차만별의 위치와 상황에 있던 얼굴들을 의미한다. 적자와 적처, 종부와 종손, 또 그 외곽엔 양자와 서얼, 첩과 기생 등이 포진했다. 개별 인생을 산 듯 보이지만 축적돼 역사가 된 이들이다. 역사로 인해 미미해지지 않은 삶이라 저자는 치켜세운다. `역사는 진행형`이란 주장을 에둘러 전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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