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종석기자] 8.3조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발적인 사채신고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시행 초기 신고실적은 매우 저조했다. 기업들 입장에서도 신고하는 것이 유리한 지, 안하는 것이 유리한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당시 언론은 주요 상가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동대문, 방산, 중앙시장 등 서울 시내 20여 도소매 시장 상인들은 8.3조치가 상거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이다. 어음 및 연수표 등으로의 구매는 상인들이 이를 꺼리고 있어 활발하지 못하다”(서울경제신문 72년 8월4일)
◇ 드러난 "지하경제" 규모...신고사채만 3456억원
사채 신고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드러나자 박 대통령은 “신고된 사채에 대해서는 일체의 자금출처조사를 하지 말라”고 국세청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자금원 노출을 우려해 사채신고를 꺼리는 행위를 막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국세청은 각 세무서에 관할 기업들의 사채신고를 독려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청와대 비서실장이 소공동세무서에 나가 직접 기업인들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태완선 부총리와 남덕우 재무장관, 김성환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정책 수뇌부는 일제히 TV 대담프로에 출연, 사채동결조치의 당위성 홍보에 주력했다.
이 같은 전방위 홍보에 힘입어 시행 초기 저조했던 사채신고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8월9일 전국 92개 세무서와 각 은행 창구에서 마감된 사채신고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3456억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통화량의 80%에 달하는 규모로 전경련이 예상했던 1800억원의 두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당시 지하경제가 얼마나 번창했는 지를 보여주는 구체적 물증이었다.
8.3조치로 3400억원을 넘는 거액사채가 일괄 동결되고 만기연장됨에 따라 그동안 줄을 잇던 대기업 부도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도 잦아들었다. 한때 7.8% 까지 떨어졌던 경제성장율은 8.3조치를 계기로 73년 다시 14.1%로 뛰어올랐다.
특단의 초법 조치를 통해 화급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는 데는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 정경유착, 기업 모럴헤저드의 시발점
8.3 사채동결조치는 기업 입장에서 더 바랄 나위없는 최상의 지원책이었다. 당장 사채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데다 원금상환 일정이 최장 8년 뒤로 유예됨에 따라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채를 빌려준 사람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조치였다. 이자수입이 대폭 줄어들고 향후 3년간은 원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됐다. 사채업자의 소득을 박탈해 기업에 이전해 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조치였다.
기업 자금난을 풀고 어려운 경제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극약처방이라고는 하지만 개인 사채권자의 무한대 희생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형평의 문제로 남는다.
또 사채를 많이 쓴 기업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고, 사채를 덜 쓴 건실한 기업에게는 혜택이 덜 가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재계의 모럴헤저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폐단은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미증유의 특혜를 줌으로써 박 정권과 재계간 정권유착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기업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이로써 경영합리화 보다는 정권과의 관계 유지에 더 신경을 쓰는 부작용을 낳았다.
위장사채로 인한 폐해도 낱낱이 드러났다.
신고사채의 3분의 1에 가까운 1137억원이 자기 기업에 사채놀이를 한 기업주의 돈인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전경련 건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던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사채 때문에 부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아우성치던 대기업들이 뒤로는 위장사채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는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위장사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노했다. 박 대통령은 1억원 이상 위장사채를 가진 대기업 등 10여개 기업에 대해서는 앞으로 일체 정책적 혜택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이 같은 지시는 그 후 소리없이 꾸준히 지켜져 해당 기업들은 거의 망하거나 존속하더라도 사세가 보잘 것 없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8.3조치로 기업들의 경영난이 해소되면서 수출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72년 하반기부터 수출이 증가세로 돌아서 73년 상반기중에는 전년동기 대비 91%나 증가하는 놀라운 신장세를 기록했다. 수출 증가에 힙입어 73년 상반기 경상수지도 전년동기 적자에서 1억2400만달러 흑자로 돌아서는 등 회복세를 나타냈다.
김용환 전 장관은 후일 회고록에서 “고리사채 동결조치는 기업부담 완화을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금업 양성화를 통해 금융시스템이 정상화되고 산업합리화 정책의 토대가 구축되는 효과를 낳았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8.3조치는 국가권력이 개인간의 사적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수정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오점으로 기록된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경제논리에 의한 문제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판단 아래 사채동결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었다. 반면 전경련은 “기획원의 안이한 현실인식과 대처로는 기업 연쇄도산과 실업증가가 불가피하다”며 사채동결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 기획원과 대척점을 이뤘다.
‘원론’이냐 ‘편법’이냐의 갈림길에서 결국 최고 통치권자가 편법의 손을 들어줬고, 이로써 재계가 원하던 8.3조치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