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만난 사람들)행복한 보험 디자이너

하정민 기자I 2006.01.20 14:27:22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좋은 직업의 기준은 딱 두 가지다. 돈을 많이 벌거나, 스트레스가 적거나. 둘 중 하나만 충족시켜주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다"

직장인들이 흔히 하는 자조섞인 탄식이다. 그리고 이 말은 상당부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를 충족시키는 직업이 있다면? 게다가 직업의 성장 잠재력까지 높다면? 그야말로 모두가 꿈에 그리는 직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직업이 존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기자는 뉴욕에 와서 이 생각을 바꿨다. 프랑스 대형 보험회사인 악사(AXA)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국 보험계리사(Actuary) 엄성민 씨(31)를 만나고 나서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보험계리사는 수학, 확률, 통계적 방법 등을 이용해 보험, 연금 등 각종 금융상품에 대한 보험료, 보상 지급금 등을 계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계리사 업무의 핵심은 미래의 위험에 대해 가격을 측정하는 것이다. 미래 위험에 가격표를 달아야만 보험 신상품 개발, 요율 산출, 배당금 결정이 가능하기 때문. 직업 특성 상 보험계리사가 되려면 보험과 관련된 전문적 지식은 물론 치밀한 계산능력, 판단력, 뛰어난 숫자감각, 정확성 등이 필요하다.

엄 씨는 자신의 직업을 `보험 디자이너`라고 손쉽게 소개했다. "흔히 보험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보험 판매인들을 먼저 떠올리시잖아요? 그분들이 자동차 딜러의 역할을 한다면 저는 자동차 디자이너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한 마디로 말해 보험 디자이너죠."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92학번인 엄 씨가 미국 보험계리사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연속이다. 얼핏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 보험계리사를 목표로 미국에 유학 와 치열한 공부 끝에 계리사 자격증을 땄다`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를 연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엄 씨는 9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고, 곧바로 뉴욕으로 건너왔다. UN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낯선 이국 땅을 밟은 것. "사랑 하나만 믿고 뉴욕으로 온 셈인데 남편이 출근하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한국에서 즐겨했던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뉴욕타임스 구직란을 뒤지며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그녀에게 남편이 "수학을 잘 하는 당신에게 맞을 거야"라며 계리사라는 직업을 권유했다.

"당시에는 계리사라는 직업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몰랐어요. 집에서 노느니 시험이나 쳐보자라는 심정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1단계 시험을 봤죠. 그런데 의외로 결과가 너무 잘 나온 거에요."

미국 보험계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험 방식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미국 보험계리사가 되려면 객관식, 주관식, 에세이, 세미나를 포함한 실무능력 테스트를 포함해 총 8차례의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하나의 시험을 통과해야 다음 단계의 시험을 볼 수 있고, 응시 기회도 1년에 두 번 밖에 없다. 때문에 8차례의 모든 시험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붙는다 해도 계리사 자격증을 얻기까지는 최소 4년이 걸린다.

첫 번째 시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2단계 시험도 쉽사리 통과했고 미국 보험회사 모니(Mony)에 입사한다. 2003년 악사가 모니를 인수하면서 그녀도 자연스럽게 악사 직원이 됐다.

미국 보험계리사는 우리나라처럼 자격증을 딴 후 취업하지 않는다. 자격증 획득 기간이 워낙 길고 과정도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2차 시험을 합격한 후 나머지 시험은 보험회사를 다니면서 통과한다.

주관식, 에세이, 세미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도 풍부한 실무 경험은 필수적.

가장 매력적인 점은 많은 보험회사들이 계리사를 준비하는 직원(Actuary Student)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다. 시험 준비를 위한 책값 지원, 시험 비용 대납은 물론, 시험이 다가오면 업무 시간에 공부하는 것도 허락해준다고 하니 입이 딱 벌어졌다. 책값은 대부분 1000달러가 넘고 시험 비용은 더 비싸다는 점, 업무 시간을 할애해준다는 점 등은 한국적 현실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미국 보험업계의 관행이 그래요. 계리사 준비 직원(Actuary Student)일수록 보수도 더 높고 승진 기회도 많아요. 시험 합격을 위해 여러모로 배려해주는 건 기본이구요. 물론 회사에서 정한 기한 안에 붙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회사에서 지원해준다고 해도 8개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는 데는 평균 6~8년이 걸린다. 10년이 걸리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러나 엄 씨는 1998년부터 시험을 준비해 불과 5년 만인 2003년 11월 8개의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초고속 합격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낙천적 성격`이다. 엄 씨 자신도 인정했지만 기자가 보기에도 낙천성을 빼놓고 그녀를 설명하긴 어려울 듯 했다.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란 자신감이 아니라 "하다보면 결국 되겠지"란 낙관적 태도로 매사에 임한다는 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언어 스트레스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을 터다. "영어 스트레스요? 물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워낙 얼굴이 두꺼워서(웃음).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계속 다시 말하는 거죠. 내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계리사 시험을 준비하니 영어 공부도 되던 걸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만큼 미국 사회에서 보험계리사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변호사나 회계사를 능가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을 정도다. 일단 시험에만 합격해도 10만~15만달러의 연봉을 받을 수 있고 갈수록 연봉이 늘어난다. 부침이 심한 금융업계에서 상대적으로 직업의 수명이 길고, 전 세계적인 고령화로 보험 및 연금 관련 산업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어 장래성도 밝다.

엄 씨가 꼽은 계리사의 최대 장점은 여유 시간이 많다는 것. "다른 전문직에 비해서는 여유가 많은 편이에요. 동료 여자 계리사 중에서는 격일제로 근무하거나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1시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어요. 기혼 여성의 직업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셈이죠. 저 역시 육아와 관련해 많은 혜택을 누렸구요."

부와 안정성을 동시에 갖춘 직업, 단란한 가정, 그리고 얼마 전에 맨해튼에 집까지 장만한 그녀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역시 낙천가다운 대답을 내놨다. "목표가 없어요. 계리사 일을 오래 할 계획도 없구요. 모기지 론 갚을 때까지는 해야겠지만(웃음). 제가 오락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항상 재미있게 사는 것이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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