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정훈기자] 총 8조9000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세출예산 삭감을 당론으로 밀고 있는 한나라당이 각 상임위에서 여당과 합의해 올린 내년도 예산은 정부가 요청한 것보다 1조원 이상 늘어났다.
이에 대해 대부분 곱지 않은 시선이다. 대대적인 세출 삭감을 주장한 한나라당과 합리적인 구조조정을 하겠다던 열린우리당의 다짐을 감안하면 이같은 결과물은 분명 `돌연변이`라고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예년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번 상임위에서 올린 예산 증액 1조3000억원은 최근 6년만에 가장 적은 수준이라는 것. 국회의원들의 속성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일보 진전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내년 예산안에 대한 상임위 심사를 한마디로 총평한다면, 예년에 비해서는 나아졌지만 기대치에 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주역은 다름 아닌 각 상임위의 예산결산심사소위에 참여한 한나라당 의원들이다. 그들이 정부예산을 깎는 모습에서 몇가지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저격수` 전면에 배치
각 상임위 전체회의에서 해당소관 부처의 내년 예산안을 심의, 의결하기 전 필수적으로 거치는 과정이 예산·결산심사소위의 예산조정회의다. 전체회의에서 의결할 해당부처 최종 예산안을 합의해 올리는 일을 한다.
한나라당이 선택한 방법은 각 상임위 심사소위에 소위 `저격수`를 배치해 부처별 예산심의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해 대대적인 세출삭감을 달성하겠다는 것.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재경위 예산·결산심사소위에 이한구 의원들 배치하고 `경제통`인 이혜훈 의원과 협공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내년도 예산배분에 있어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보건복지 분야에서의 예산 삭감을 추진하기 위해 보건복지위 소위에는 정형근 의원을 전면 배치했다.
이밖에도 국방위에 권경석 의원, 산자위에 이병석 의원, 정무위에 김정훈 의원 등을 주요 포스트로 삼고 `화이팅 스피리트(fighting spirit)`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열린우리당측에서는 "한나라당에서 싸움 기질이 강한 의원들이 예산심사소위에 전면 배치돼 예산안 심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었고, 실제 소위에서 이들의 위력은 강하게 발휘됐다.
`벼랑끝 전술` 활용
`벼랑끝 전술`도 한나라당의 이번 예산안 심사에서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배수진을 치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안간힘을 다해 버텨보겠다는 속셈이다.
예산삭감 규모는 미미했지만, 국정홍보처가 `어용기관`이라며 폐지법안을 발의하고 대폭적인 예산삭감을 주장했던 한나라당은 끝까지 기존 방침을 고수했다. 2조6334억원의 남북협력기금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최후의 버티기 끝에 표결도 통과시켰다.
그러나 강경한 야당의 주장에 정부 여당은 내년 예산집행은 어느 때보다 신중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재경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전문대학원 설립과 금융 전문가 네트워크 구축사업의 경우에도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죽을 한이 있어도 인정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반대입장을 일부 야당 의원들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들 사업도 소위를 통과하긴 했지만, `허용`과 `일정 예산삭감`을 맞바꾸면서 당초 정부가 생각한 예산안에서 10% 정도씩 삭감해 정부로 하여금 알뜰하게 사업을 꾸리도록 만들었다.
심사소위 합의 뒤집기
사실상 여야 양당이 참여하는 심사소위에서 예산안을 최종 확정지으면 대부분 원안대로 전체회의를 통과하게 마련이지만, 한나라당은 소위에서의 합의사항을 거부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재경위 전체회의로, 예산·결산심사소위에서 2500억원에서 1500억원으로 재경부 일시차입금 이자상환 예산을 1000억원이나 줄여서 전체회의에 예산안을 제출했다.
여야가 이미 합의한 만큼 무난한 처리가 예상됐지만, 한나라당은 윤건영 의원 등 일부 강경 의원과 재경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종근 의원 등이 목소리를 모아 해당 예산을 재검토하라고 심사소위로 돌려 보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소위에서 합의해 올린 예산안은 위원장 개인이나 일부 의원들의 소수 생각으로 반려시킨다는 것은 소위의 결정권이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는 이례적인 조치지만, 한나라당은 국가재정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위에 참여한 당 의원들이 정부 여당의 논리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든 재검토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표`앞에선 물러서기
이처럼 어느 때보다 강력한 세출삭감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한나라당이지만, 여전히 표와 직결된 사업예산을 깎지 못하는 고질적인 병폐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굵직굵직한 사업이 가장 많아 지역 민심과 관련이 깊은 건교위에서는 대표적 지역민원 사업인 교통시설특별회계가 9193억원으로, 당초 정부가 제출한 안보다 92.4%나 예산을 늘려 잡았다. 인천국제공항 2단계 건설사업과 재해예방 수계치수 사업 등이 크게 늘어났다.
농림해양수산위도 쌀 의무 수입량 확대로 인한 쌀값 하락을 보전할 쌀 소득보전 고정직불금을 정부안보다 998억원 늘려 잡았고, 농민 부채상환 연장에 따른 이자차액 보전금도 549억원을 늘였다.
교육위의 경우 국립학교 시설 확충비가 222억여원 늘었고 사립유치원 담임교사 수당 인상과 유치원 종일반 운영지원비 등 유아교육 지원비도 216억여원이 늘었다. 이밖에 보건복지위와 여성가족위 등 국가 지원이 많은 상임위의 사업예산도 크게 늘어났다.
끝으로 부연하자면, 이같은 한나라당의 전술은 어디까지나 상임위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일 뿐 예결특위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부처별 대폭적인 예산 삭감이라는 큰 전략은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상임위의 예산심의 결과가 기대한 수준이라면 예결특위의 심사는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