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박동석 김춘동기자] 요즘 ‘안티 국민연금’ 여론이 무서운 속도로 퍼지자 정부 당국이 진압책을 마련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안티즌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국민연금을 보기 보다는 감성에 지나치게 의존해 공격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다.
안티즌들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연금수급 조건을 완화하고 강제징수 기준을 개선하는 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안티즌(국민연금에 반대하는 네티즌)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전세는 정부에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왜 국가가 나와 아내의 재산을 빼앗고(2개 연금 수급 금지), 빚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판에 왜 연금은 강제로 내야 하느냐(강제 징수)는 안티즌들의 반발에 정부는 할 말을 잃은 상태다. 쩔쩔맬 따름이다.
합리적 설명은 먹혀들지도 않는다. 한 사람이 손해를 볼 수는 있으나 그 손해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으로 돌아가니까 다소 억울하더라도 (정부를) 믿고 좀 참아달라는 얘기만 되풀이한다.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소득재분배 기능을 이해해 달라는 호소다.
하지만 성난 안티즌들이 쉽게 물러설 리 만무다. 곧 분배는 세금을 거둬서 해결하면 될 게 아니냐는 반대논리가 이어진다. 국가의 장래와 후손들을 위해 참아달라는 정부의 읍소는 궁색하게만 느껴진다.
◇ 연금의 부끄러운 역사
알고보면 안티즌들의 무차별 폭격을 방어하고 있는 정부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빠듯한 나라살림으로는 전 국민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티즌들에겐 먼 장래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는 연금 문제를 설득하기도 만만치 않다.
백약이 무효인 듯하다.
이 보다 더 딱한 면도 있다. 정부와 안티 국민연금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금의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제의하지만 숨겨야 할 비밀이 있어서다.
“복지를 맡고 있는 장관이나 국민연금 관리공단 이사장이나 속으로 ‘여러분들이 밀어준 이 정권이 유지되는 것을 바란다면, 국가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제발 이러지 마라’라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지도 모르겠다.”
한 연금전문가의 말이다.
그러나 막상 이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다.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나 유럽, 미국등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다.
연금은 국가가 운영하는 대표적 사회보장제도다. 그렇지만 연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정치와 권력의 음모가 발견된다. 연금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때는 1883년으로 옛 독일의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진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사진)에 의해 고안됐다. 그는 어떻게 연금을 떠올렸을까.
“늙었거나 병들었을 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면 더 행복해 하고 더 유순해져서 다루기가 쉽다. … 사회주의국가에서든 어디서든 이 제도는 꼭 필요하다. … 아마 2억 마르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들 한다. 3억 마르크가 든다 해도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액수의 돈으로 가난하고 상속받은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면 과히 비싼 것도 아니다. 국가는 그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지만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꼭 이해시켜야 한다.”
전 인디펜던트誌 경제부장 폴 월리스(Paul Wallice)에 따르면 비스마르크는 연금을 도입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폴 월리스는 여기에는 두 가지 중대한 원칙이 감춰져 있다고 분석한다.
하나는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할 수 있다면 비용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원칙이다.
비스마르크는 여기에 한 가지 속임수를 더 얹어 놓았다. 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를 연금을 낸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보다 훨씬 높은 70세로 규정해 국가가 많은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놓은 것이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노령자 연금을 설계한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도 1911년 선거에서 "4펜스로 9펜스를"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식이었다.
많은 국가들이 내세운 이 서약들은 20세기 초반 대공황과 전쟁,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그러다 전후 베이비붐과 엄청난 속도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다시 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지금 연금이 맞고 있는 위기는 20세기 초반에 이은 두 번째 파동이다. 첫 번째 파동은 불황에서 왔으나 이번 파동은 인구구조의 격변에서 파생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 연금은 피라미드 사기?
1920년 미국 보스톤에 찰스 폰지(Charles Ponzi)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있었다. 그는 돈을 맡기면 90일 안에 2배로 돌려주겠다며 투자자들을 유인해 엄청난 돈을 끌어들였다. 초기에는 그의 말대로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올린 사람들도 나타났다.
폰지의 인기도 폭발했다. 대박을 꿈꾸며 그에게 맡긴 돈이 순식간에 10억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아무런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투자금의 일부는 그가 착복하고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배당금은 다음에 돈을 투자한 사람들의 납입금으로 지불했다.
인기는 구조적으로 오래갈 수 없었다. 폰지의 사업은 쉴새없이 돌아가는 팽이처럼 계속 사람들을 모아야만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폰지의 말에 혹한 사람들이 계속 꼬여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손님이 끊길 경우 그 앞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돌려줄 배당금이 없기 때문에 그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사업은 1년을 넘지 못하고 순식간에 망가져 버렸다.
폰지는 그해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뿐만 아니라 폰지는 허황된 꿈을 판 사기꾼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에서 처음 도입한 연금은 이 폰지방식과 똑같았다. 초기에는 적립금을 낸 적이 없는 노인들에게도 연금을 지불했다. 버몬트에 살았던 이다 메이 풀러(Ida May Fuller)는 연금의 첫 수혜자가 되어 24.75달러만 내고 100살까지 2만2889달러나 받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조차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을 정도로 연금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의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간수명이 길어지는 고령화가 가속화하면서 연금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흔히 Pay-As-You-Go(부과방식)로 불리는 재래식 연금시스템은 일하는 사람들이 퇴직자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이 시스템은 인구구조가 피라미드를 형성할 때는 통하지만 노인인구가 늘어 역삼각형으로 바뀌면 유지할 방법이 없다.
대부분 이런 방식의 연금을 택하고 있는 유럽은 지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고령화로 인해 젊은이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연금 부족분을 국가가 대신 메워주고 있어서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엄청나다. 국가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다. 실제 EU 국가들은 매년 GDP의 12% 이상을 연금지출에 쏟아붓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2배나 많은 지출이다. 세계은행은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및 스페인의 공적연금이 2030년이 되면 부채가 자산을 4조6000억 유로(약 5조 5,000억 달러)나 초과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인구구조의 격변으로 폰지식 사기는 이제 가당치도 않은 수법이 돼버렸다.
◇ 우리나라 연금의 역사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연금 역사는 일천하다. 공적연금의 효시인 공무원연금은 1960년에야 시작됐다. 유럽이나 미국이 19세기부터 연금을 도입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전국민 대상의 국민연금은 이보다도 28년이나 늦은 1988년에 출발했다.
그나마 근로자 1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절름발이 연금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5년 7월에는 농어촌지역 주민까지 적용범위가 확대되고, 1999년 4월에는 도시지역 자영업자들로까지 가입범위가 확대되면서 전국민 연금시대를 열게 된다.
크기만으로 따지자면 국민연금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일궈내고 있다. 1988년 시행 당시 443만명에 불과하던 가입자 수는 올 4월 1720만명으로 4배정도 불어났으며, 적립금 규모도 초기 4867억원에서 올 4월 현재 119조원으로 급증해 있다. 2030년께는 1000조가 넘는다는 전망도 있다.
그러나 풍요의 기쁨은 잠깐이다.
국민연금이 100조원 이상 쌓여 있는 이유는 불행히도 운용수익이 좋아서가 아니다. 들어오는 연금(보험료)에 비해 나가는 연금(급여)이 거의 없어서다. 올 4월 현재 국민연금을 타가는 사람들은 117만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도를 도입한 지 20년(완전노령연금을 타갈 자격이 생기는 햇수)이 되는 2008년부터는 연금수급자 수가 약 300만 명을 넘어서면서 본격적인 지출이 일어난다고 국민연금발전위원회는 밝히고 있다.
그 전까지 밀물처럼 곳간으로 밀어닥치던 연금은 이때를 기점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국민연금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 추정대로라면 저수지(기금)로 들어오는 물(돈)보다 나가는 물이 더 많아져 적자가 발생하는 첫해가 2036년이다. 불과 23년 앞이다. 여기서 11년 후인 2047년에는 저수지에 물이 말라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연금고갈 시기를 2047년으로 늦춘 것도 1998년 한 차례 수술을 단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당시 정부는 국민연금 가입기간 동안 벌어들인 평균소득의 70%를 지급하는 것으로 돼 있는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추고 연금을 타는 나이도 60세에서 2033년까지 단계적으로 65세로 올리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2013년부터 5년에 1세씩 5세를 높여나간다는 계획이다.
이 개혁이 없었더라면 국민연금은 2022년에 적자가 발생하고 그보다 11년 뒤인 2033년에 고갈될 운명이었다. 결국 개혁은 시한폭탄의 초침을 14년 정도 미뤄놓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 100조원은 나중에 발생할 적자에 비하면 코끼리 비스킷 정도밖에 안 된다. 고령화의 급물살을 맞게 되면 순식간에 씻겨나갈 모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