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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마케팅은 품질..콧대 높던 GM·아우디도 빗장 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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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기자I 2025.06.11 06:00:00

■예종석의 파워인터뷰-권영직 광진그룹 회장
대학 재학 중 볼트회사 취직해 10년 경험
프레스공장 인수하며 제조업 뛰어들어
현대차 첫 승용차 포니 품목검사 합격 1호
GM 공급 따내며 ''불량 없는 업체'' 소문
폭스바겐 등 글로벌 완성차 러브콜 쇄도

우리 사회에 따뜻함을 전해온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권영직 광진그룹 회장이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와 인터뷰하며 활짝 미소짓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미국 자동차기업들이 밀집한 디트로이트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빨간 우체통 앞에 돼지 머리를 두고 절을 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던 것. 이런 진풍경은 당시 디트로이트 지역신문에 실리며 화제가 됐다.

10일 서울 중구 KG타워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권영직(87) 광진그룹 회장은 “미국 자동차회사 GM에 납품 입찰 서류를 내러 갔는데 우편 접수만 받았다. 우리를 꼭 선정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GM본사 앞 빨간 우체통 앞에서 큰절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바람이 통했을까? 광진그룹은 1996년 GM의 자동차 부품 1차 제조사로 합류했고 품질을 인정받으며 미국 ‘빅3’ 자동차 기업과 유럽 폭스바겐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에 꾸준히 러브콜을 받아 현재 국내뿐 아니라 미국, 멕시코, 브라질, 폴란드 등 11개국 20개 공장, 4개 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권 회장은 성공비결로 첫째도 둘째도 ‘품질 관리’를 꼽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산도 백도 없던 나에게 품질이 즉 마케팅이었다. 우리 공장 연구소에선 수십만 번씩 차량용 유리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오작동을 사전에 발견해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고 말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사실 그는 이공계 출신이 아닌 고려대 경영대 출신이다. 10년만 일하면 청계천에 가게를 내준다는 약속에 대학 재학 중 친구 아버지 회사인 협신볼트에 입사했다. 아침에는 청소, 공구관리, 공장작업지시서 발주, 오후에는 영업사원으로 변신해 거래처 수금, 저녁에는 경리를 봤다. 그렇게 10년을 일했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공장이 어려워지며 사장이 바뀌었고 약속도 휴짓조각이 됐다. 1973년 상업은행의 담보물건인 스케이트날을 만드는 작은 프레스공장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국제개발은행자금으로 한국에서 기차를 만들게 됐다. 대우중공업 전신인 한국기계가 맡았단 소식을 듣고 기차 부품을 납품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덤벼들었다. 무궁화호 짐받이 파이프에 스테인리스를 입힌 자재가 들어갔다. 그 부분과 기차의 중간 문을 만들려 도전했지만 처음부터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다. 한국기계 구매담당자가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출근 시간에 찾아가 잘 봐달라고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우리 기술로 기차를 만들 때 우리 제품이 들어갔다. 그 이후 지하철 1호선이 처음 생길 때도 우리 제품을 납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조업을 시작했다.

-현재 주력은 자동차 부품 생산이지 않나.

△1970년대 초 대한민국에 자동차 산업이 막 태동했다. 1975년 현대차에서 포니가 세상에 나오던 그 순간, 현대차 경영진이 협력사를 직접 찾으러 다녔다. 한번은 우리 공장을 찾아와 스트럿 브라켓(차체 쏠림, 뒤틀림 방지 부품)이라는 차량 부품을 개발해보라고 제안했다.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지만 우리 공장장이 일주일 만에 샘플을 만들어냈고 그 자리에서 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운명이 바뀌었다.

-처음부터 잘 풀렸나.

△‘대한민국 최초인 고유모델’인 현대차 포니 품목 검사 합격(초도품 승인) 1호가 우리였다. 처음이라 원가계산이 잘 안 되어 현대차 직원의 조언을 받아 최소가격을 제출하면서 공급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보답하고자 나도 물건을 살 때 싸고 좋은 물건을 찾는 것처럼 물건을 팔 때도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서 주면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권영직 회장은 인터뷰 내내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돈이나 백이 아닌 품질과 기술력만이 광진의 길이었다고 말했다. (사진=김태형 기자)
-윈도우 레귤레이터 개발 과정은 어땠나.

△어느 날 현대차 직원이 찾아와 윈도우 레귤레이터(창문을 여닫는 부품) 개발을 부탁했다. 다른 업체에서 공급을 받았는데 불량이 많아서 애를 먹고 있었던 거 같다. 우리 공장장에게 보여주니 어려운 물건이라면서도 일주일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현대차에 주니 100% 합격 판정을 내줬다. 처음에는 발주량이 우리 회사가 30%, 타사가 70%였다. 이후 발주량이 점점 늘어나 결국 시장 점유율이 역전돼 우리가 80%까지 올라갔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현대차 내에서 ‘개발이 어렵고 까다로운 제품은 광진으로 갖다 줘라!’라는 말이 생겼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니 생긴 말이었다. 이런 믿음에 부응하면서 안산 반월공단에 입주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키웠고 포니를 시작으로 소나타, 아반떼, 그랜저 등 다양한 차종에 부품을 공급하게 됐다.

-해외 진출 배경이 궁금한데.

△1980년대 후반에 해외진출을 결심했다. 국내에서 실력과 기술로 인정받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 완성차 부품업체(1차 벤더)의 하청이라도 받아낼 마음으로 미국 길에 올랐다. 그런데 현지 공장을 둘러보니 내가 직접 공급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려고 하면 풀어나가야 하는 길이 다 있지 않나. 건물에 들어가면 안내실을 찾아가 길을 묻는 것처럼 해외진출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 디트로이트 한국 자동차 기술자들 모임(KPAI)을 무작정 찾아가서 GM과 포드에 납품할 방법을 알려달라 했다. 거기서 GM현직에 있는 한국사람이 ‘이렇게 하면 된다’고 길을 알려주더라. 그 방법대로 해 나가며 조금씩 터득했다.

-미국에서 바로 성과가 나오진 않았는데.

△포드와 GM을 두드리며 3년 넘게 좌절을 겪었다. 처음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GM이 글로벌화 정책을 선언하면서 기회가 왔고 샘플을 만들어 제출했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었다. 한국조차 낯설던 때에 들어본 적도 없는 부품회사와 거래한다는 것은 GM에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국에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 무렵 GM 간부를 만나, ‘이번에 한국에서 큰 훈장을 받는다. 그러면 대통령과 식사를 하는데, 그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을 거다. 그때 GM에 공급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말할 텐데, 그때 잘 되고 있다고 답을 할까? 안 되고 있다고 답을 할까?’라고 물었다. 듣고만 있던 GM간부가 갑자기 ‘미스터 권’이라고 부르더라. 그러면서 “내가 보증하겠다”고 했다. 그 순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싶을 만큼 기뻤다. 1997년 GM의 공식 납품 업체에 주어지는 Z-코드 넘버 AQ-64를 부여받아 3년간 연간 8만대(35억원 상당)를 납품할 수 있었다. GM 내에서 ‘불량 없는 업체’로 소문이 났고, GM의 주요 차종에 부품을 공급했다. 이후 GM, 포드, 폭스바겐, 아우디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게 됐다. 품질이 곧 마케팅이라는 신념이 현실이 됐다.

-불량이 없는 회사로 유명하다. 어떻게 제품에 불량이 없을 수 있나.

△해외진출 성과에 회사 구성원 모두가 신바람 나게 일했다. 그러다 보니 물건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왔다. GM 내에 소문이 퍼지니 다른 모델 발주가 막 나왔다. 밀려드는 주문을 우리가 소화를 못 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GM에 납품한 물건이 불량이 나서 속을 썩인 건 한 건도 없다. 많이 팔리는 차도 잘 만들어야 하지만, 제일 좋은 차에 들어가는 것과 품질이 달라선 안 된다는 게 광진상공의 신념이다. 완성차 업체에서는 품질과 납기 등을 모두 전산화해서 한번에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 노란색만 떠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철저하게 관리한다. 우린 모두 파란색이다. 품질이 경쟁력일 수밖에 없다. 은퇴할 나이에도 매주 화요일 오전 9시 국내외 공장 책임자들과 품질회의를 한다. 불량 사례를 공유하고 원인과 개선책을 논의한다. 나는 다른 건 말하지 않는다. 오직 품질관리로만 싫은 소리를 한다.

권영직 회장이 미국 진출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품질과 관련된 고속도로 일화가 있지 않나.

△차를 타고 경주공장에 내려가는데 톨게이트에서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통행료를 냈다. 자동차 유리문 고장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 번호를 적어뒀다가 경찰서에 문의해 차 주인에게 새 물건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윈도우 레귤레이터를 내가 만들고 있는데 미안한 마음에 연락드린다고 했다. 차주가 ‘세상에 이런 분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불량이 나면 해당 직원을 야단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게 내 일이다. 차량 윈도우가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린 3정(정품, 정량, 정위치) 5행(정리, 정돈, 청소, 청결, 습관화) 운동을 통해 당시 불가능하다고 일컫는 불량률 100PPM을 달성했다. 품질 문제의 유형을 세부적으로 분석, 문제의 제발 가능성을 0%로 낮춘 뒤 사후 관리도 꼼꼼하게 하고 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상도 많이 받았는데.


△GM에서 SOY시상식(Supplier Of the Year)이 29번 있었는데 우리가 22번 받았다. 아시아 최초 QS9000 인증을 획득했다. 1997년 광진아메리카 설립 후 2개월 후엔 GM Satum에서 선정한 품질 우수상과 우수 협력업체상을 받았다. GM이 최고 협력업체에 수여하는 GM 1996 올해의 우수 협력업체로도 선정됐다. 무역협회가 수여하는 제3회 세계화 우수기업 경진대회 우수상도 받았다. 국내가 외환위기 상황이었을 때 직원들이 더 똘똘 뭉쳐서 난국을 헤쳐나갔다. 덕분에 해외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현재는 미국을 포함 멕시코, 브라질, 폴란드, 인도, 중국 등에 해외공장을 설립해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현지 로컬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해외에도 공장이 20곳이나 된다. 해외 인사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국내에서 함께 일하던 임직원들을 해외 법인장으로 보내 한국식 인사관리와 현지 문화를 조화롭게 접목해나가고 있다. 우리 법인장들은 어디에 보내도 잘 해내는 것이 강점이다. 멕시코공장 법인장은 스페인어를 못했지만 밤마다 공부하며 현지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번은 직원이 출근을 안 하면 집으로 찾아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많다. 덕분에 우리 회사는 현지 직원들과의 신뢰가 높다.

-경영 철학은.

△첫째도 둘째도 품질이다. 불량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고 개선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오직 체력과 성실함, 그리고 품질로 승부해왔다.

-가족은.

△1남 2녀다. 아들이 현재 총괄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해외 법인장들과도 잘 융화되고 현대차 등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딸 둘은 결혼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87세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척추협착증이 있지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 스트레칭을 하고 규칙적인 식사와 생활습관을 유지한다. 부부가 함께 건강을 챙긴다.

-50여 년 경영 생활을 돌아보며, 젊은 창업가들에게 조언해준다면.


△제조업 창업은 처음부터 큰 꿈을 꾸기보다 인내와 성실로 15년 이상 현장에서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나 역시 대장간 같은 현장에서 10년 넘게 청소부터 납품, 경리까지 모든 일을 하며 배웠다. 근면과 성실, 그리고 품질에 대한 집념이 결국 성공을 이끈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다.

■권영직 △1939년생 △고려대 졸업 △1973년 광진기계 설립 △1978년 광진상공 대표이사 △현 광진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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