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이종석기자] 식량 자급자족은 경제성장, 국방안보와 함께 박 대통령이 가장 집념을 보인 과제였다. 그는 식량자급을 가난 추방의 첫 걸음으로 간주했다. “식량문제 해결 없이는 국가안보 또한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 “누가 맛없다고 그래?”
박 대통령은 농민들의 증산의욕을 북돋기 위해 73년 다수확 시상제도를 도입, ‘전국 증산왕’을 선발 시상했다. 또 다수확 신품종 개발에 공이 큰 연구종사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새로 개발된 품종에는 그 개발에 공이 있는 연구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78년 처음으로 朴魯豊 박사가 개발한 벼가 ‘魯豊’으로 명명돼 보급되기도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박 대통령의 이름을 딴 볍씨도 있었다. 65년 도입된 ‘희농(熙農)1호’가 바로 그것이었다.
희농은 중앙정보부 요원이 64년 이집트에서 훔쳐온 볍씨로, 박정희의 희(熙) 자를 따 희농1호로 이름 붙였다. 65년 시험재배에서 재래종보다 30%이상 수확률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당시 언론에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기도 했다.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던 박정희에게 ‘희농’은 말 그대로 희망 그 자체였다. 청와대 집무실 옆에 희농볍씨를 가져다 놓고는 방문객들에게 “우리도 보릿고개를 넘길 효자가 생겼다”며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희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67년 일반농가에 보급시켜 재배한 결과 추수가 어려울 정도의 흉작을 기록했다. 근본적으로 한국 기후와 풍토에 전혀 맞지 않는 외래 품종이었던 탓이다.
박정희의 실망은 컸다. 71년 진짜 ‘기적의 볍씨’인 통일벼를 소개하면서도 그는 “과거(희농)에 안됐기 때문에 이것도 되겠느냐고 의심할 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될 것”이라며 희농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희농 이후 박정희는 어떤 상품에도 자신의 이름을 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희농에 이어 두번째 ‘기적의 볍씨’로 등장한 통일벼에 대해 박정희는 절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통일벼에 대한 `맛` 평가였다. 통일벼는 다수확에는 성공했지만 맛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였다. 찰기가 부족해 식으면 금방 푸석푸석해졌다.
71년 2월5일 월례 경제동향보고회가 끝난 후 국무위원들을 대상으로 통일쌀밥에 대한 품평회가 열렸다. 대통령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김인환 농진청장이 무기명으로 평가서를 돌렸다.
박 대통령은 무기명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날짜와 사인까지 적어놓고는 평가항목에 ▲ 색깔-‘좋음’ ▲ 차진 정도-‘보통’ ▲ 밥맛-‘좋음’이라고 답했다.
그리곤 한마디 덧붙였다.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 주고 외국쌀 사 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대통령의 일갈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뿌리내린 통일벼는 74년 3000만섬, 77년 4000만섬 돌파 등 기록적인 쌀 증산을 주도하며 녹색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다. 박정희는 통일벼 덕에 77년1월 대북 쌀지원을 제의하는 정치적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통일벼는 ‘주곡 자급’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70년대 후반 사라졌지만, 농촌진흥청은 이후로도 통일형 다수확 품종 개발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96년에는 ‘다산(多産)벼’와 ‘남천(南川)벼’를 개발하는 등 단당 1000Kg 돌파를 위한 신품종 연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 녹색혁명에 버금가는 “은색혁명”
녹색혁명과 함께 70년대 식량자급 및 농가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한 것이 이른바 ‘은색혁명’이다.
박 대통령은 65년초 연두순시차 경남 김해의 비닐온상 재배농가를 방문했다. 오이와 상추 토마토 등을 온상재배하는 곳이었는데 추운 겨울에도 농작물들이 잘 자라고 있었고, 출산품은 요정 등 고급 음식점에 비싼 값으로 팔려나간다는 것이었다.
겨울철이면 일이 없어 놀 수 밖에 없는 농촌지역의 노동력 활용 방안을 강구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비닐온상을 장려해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후 각 도 순시석상에서 김해 사례를 소개하고, 비닐온상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즉각 반영됐다.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비닐하우스가 급속도로 보급됐다.
그러나 비닐하우스는 대전 이남 지방에서는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그 위쪽에서는 성과가 좋질 못했다. 기후 관계로 인해 대전 이북 지역에서는 비닐하우스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박 대통령은 전 국토의 온상재배가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김해지구에서 온상재배를 배운 영농청년 2명을 선발해 경기도 기흥 인근에 비닐농장을 만들어 주고 시험재배에 나서게 했다. 시험재배에는 서울대 농대 교수진과 경기도 농업진흥청 연구팀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마침내 서울 근교 북부지방에서도 비닐온상 재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온상재배 장려에 나섰고, 비닐하우스는 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농가소득 증대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회고록에서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곳곳에서 은색으로 반짝이는 비닐온상이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녹색혁명에 버금가는 이른바 ‘은색혁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