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0년. 도하개발아젠다(DDA)협정 추진, 잇단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으로 범세계적 시장 통합이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식품 서비스 산업기술간 융복합화에 속도가 붙고, 지구온난화에 따른 자원 희소성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농업은 여전히 보호와 보조금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대로 두면 농업은 우리의 경제성장을 갉아먹을 골칫거리로 전락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반면 농업의 이런 낙후성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큰 희망이기도 하다. 농업의 성장 산업화에 성공할 경우 우리 경제의 잠재 성장력을 크게 보완하고 부족한 일자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뿐 아니라 지역 균형발전까지 도모할 수가 있다.
◇ 200조원이나 쏟아붓고도...
정부는 UR타결 이후 3차례에 걸쳐 종합대책을 내놨다. 1992년부터 2013년까지 정부의 투융자 규모는 무려 206조원에 달한다. 하지만 정부의 투융자에 의존한 농업은 오히려 자생력이 약해졌다. 고비용 생산구조 및 도농격차가 지속되고 있는 등 농업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현재 우리의 농업 경쟁력은 잠재적 최대수준을 100으로 볼 때 52.8%에 불과하다.
우리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농업(부가가치기준)의 비중은 1995년 5.5%에서 2006년에는 절반수준인 2.6%로 크게 축소됐다. 농가의 소득은 1995년 도시근로자의 95%수준에서 2008년 65.3%로 도농간 격차가 크게 확대됐다. 가구당 농가부채는 지난 10년간 3배이상 늘어났다.
지난 2008년 식량자급률은 51.7%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1960년 98.6%에서 1970년 86.1%, 1980년 69.6% 등 지속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곡물 자급률은 27%에 불과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10년후 한국 농업은 산업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며 "이제 농업은 사양화할 것이냐, 또는 산업화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 처음으로 그린 `농업 산업화` 청사진
우리와 비슷한 농업환경을 지닌 네덜란드는 낙농에서 화훼, 양돈 등으로 생산구조를 바꾸고 농업 교육의 인프라를 구축하며 세계 2~3위의 농업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기후나 경지면적 등 환경이 우리보다 불리한데도 네덜란드의 농가소득은 한국의 2.4배, 농산물수출액은 32배에 달한다.
농업의 개방화와 인구의 고령화가 가속화되는데도 제대로 된 구조조정과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농업은 더 이상 지속성장이 불가능한 상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DDA FTA 등으로 향후 10년간 농어업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변화한 것보다 훨씬 큰 변화를 겪을 것"이라며 "농업과 농촌의 발전없이는 결코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농림수산식품부가 발표한 `농정비전2020`도 이같은 인식에서 출발했다. 2020년까지 농식품 수출 300억달러를 달성하고, 식품산업 매출을 260조원으로 끌어올려 212만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시장 창출과 산업화, 수출을 핵심으로 내걸었다.
2008년 기준 세계 농식품시장규모는 약 4조3890억달러로 자동차 시장의 2.5배에 달하며 IT산업보다도 1.4배나 크다. 서울을 기준으로 반경 2000km 이내에 15억명의 인구와 7400억달러규모의 식품시장이 인접해 있다. 네덜란드 등 농업 선진국의 사례를 비춰볼 때 농업의 발전은 농식품 수출과 불가분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현재 우리의 농식품 수출은 44억달러(2008년 기준)로 세계 식품교역규모의 0.3%를 밑돌고 있다. 농식품 수출액은 34억달러이던 지난 1995년 이후 연평균 1.9%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는 같은 기간 전체 수출(연평균 9.4%)증가율의 5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만큼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 농산업은 `사람`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농업의 산업화를 위해 상품차별화와 농기업가 육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수입쇠고기보다 2배이상 비싼 한우가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이나 기존 감귤보다 당도가 높고 비싼 한라봉, 천해향 등 국내산 명품 감귤이 등장한 것을 생각하면 `상품차별화`가 농업이 산업으로 발전하는데 핵심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농업에서의 변화는 작지만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생명산업, IT BT 등을 만나 융복합하며 새로운 녹색 산업으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남 남해 고성군에서는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고 100% 무공해 재배를 했다. 그 결과 영농비는 60%나 줄어들었고, 생산량은 6% 늘었으며, 가격은 35%나 높아졌다. 고성 쌀은 농식품부가 선정한 고품질 부문 최우수 쌀의 영예를 안고, 미국으로도 수출됐다.
농촌진흥청은 지난해 12월 세계 최초 누에고치로 인공고막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농업이 의학을 만나 새로운 신기술, 신시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농진청은 실크소재 인공고막 외에도 지난해 6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과 공동으로 인체 이식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형질전환 미니돼지를 생산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농업경영을 활성화해 산업으로 키우려면 정부의 농정기조를 `생산성 향상과 소득보전`에서 `시장왜곡을 최소화하고 친환경적인 농정`으로 전환해 농업의 근본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지원정책도 경쟁력 있는 농업인력 양성, 유망기술 및 품목에 대한 정보 등 R&D기반 구축 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더불어 농업인 스스로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자세가 농업 변화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동안 보조금에 의존해왔던 농업인 스스로가 경영 마인드와 기업가 정신, 핵심역량을 갖추고 주체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김병률 농촌경제연구원 미래정책연구실장은 "정부의 보조금이 그냥 `퍼주기식`이 아닌 농업의 재생산과 경제력 강화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며 "제일 중요한 정책은 사람에 대한 정책과 첨단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분야"라고 강조했다.
특히 최근 고학력의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상당수 귀농하고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평균 이상의 수준높은 교육과 투자가 향후 우리 농업을 아시아의 `네덜란드`로 발전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며 "농정체제를 바꾸고 농수협을 개혁하는 한편 농어업인의 마인드 전환을 이뤄 농산업발전을 현실화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