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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퇴직연금 계좌에 수익이 나지 않으면 그해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
신한금융이 파격적인 퇴직연금 수수료 개편안을 내놓았다. ‘쥐꼬리 수익률’ 오명을 벗는 첫 단계로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한해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질 경우 수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금융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급격한 고령화와 함께 급성장할 퇴직연금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조용병 “면제 정도는 해야 실질적 혜택”
16일 신한금융에 따르면 신한은행·신한금융투자·신한생명을 아우르는 지주사 내 퇴직연금사업부문은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수수료 인하안을 다음달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룹사 중 신한은행이 먼저 실시한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 소득보장을 위한 주요 축이다. 하지만 그동안 저조한 자산운용 성과로 가입자의 불만을 불러왔다. 1% 남짓한 퇴직연금 수익률에서 0.5% 안팎의 수수료를 금융사에 주고 1% 내외의 연 물가 상승률까지 빼면, 오히려 손해라는 비아냥도 적지 않았다. 은행권에서 퇴직연금 적립액이 가장 많은 신한은행의 경우 올해 1분기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 IRP의 수익률은 각각 1.56%, 1.52%, 1.40%에 불과했다. 은행권 최고 수준이 이 정도다. 신한금융이 이번에 수수료 인하안을 내놓은 것은 실질적인 수익률 높이기를 위한 첫 걸음이라는 평가다.
금융사 입장에서도 퇴직연금은 비(非)이자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다. 우리나라 공적·사적연금의 실질소득대체율이 선진국보다 낮은 상황에서 향후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성은 이견이 크지 않아서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규모는 187조9000억원에 달한다. 올해는 200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신한금융의 이번 개편안에서 주목할 것은 수수료 면제다. 특정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자영업자 등이 많이 가입하는 개인형 IRP가 그 대상이다. 퇴직연금 수수료는 운용관리수수료와 자산관리수수료로 나뉘는데, 신한금융은 계약응당일(매년 계약일과 동일한 날) 누적 수익률이 0% 이하인 고객에게는 그해 수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두 가지 수수료를 모두 면제하는 건 업계에서 처음”이라고 했다. 신한금융은 지난 4월 퇴직연금 사업조직을 확대하면서 일찌감치 수수료 면제안의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병 회장은 “그 정도(수수료 면제)는 해야 고객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갈 수 있다”며 특별 지시를 내렸다.
신한금융은 또 개인형 IRP에 한해 △만 34세 이하 고객 운용관리수수료 20% 감면 △10년 이상 장기 가입자 운용·자산관리수수료 최대 20% 감면 △연금 방식으로 수령시 수령기간 운용관리수수료 30% 감면 등도 결정했다.
이외에 DB형·DC형 사업자 수수료도 인하하기로 했다. 적립액 30억원 미만 기업에 한해 운용관리수수료를 0.02~0.10%포인트 내리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사회적기업의 운용·자산관리수수료도 50% 감면하기로 했다.
◇퇴직연금 수수료 인하 경쟁 줄이을듯
신한금융은 수수료 개편과 함께 수익률 제고도 추진한다. 그룹 내 GIB사업부문과 신한BNPP자산운용, 신한대체투자운용, 신한리츠운용 등 자본시장 자회사들과 협업한다는 방침이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지만 동시에 수익성도 높은) 부동산 리츠, 시회간접자본(SOC) 펀드 등을 퇴직연금과 결합하는 작업을 단계별로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신한금융은 온·오프라인 전용 플랫폼도 곧 출시할 예정이다.
신한금융의 파격에 금융권의 퇴직연금 경쟁도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은 지난달 말 지주사 내에 컨트롤타워인 연금본부를 신설했다. 퇴직연금 사업의 새판짜기를 위한 행보다. 우리금융도 올해 3분기 중 퇴직연금 자산관리센터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고, 연내 수수료 인하안도 검토하고 있다. 하나금융 역시 사회 초년생과 은퇴 세대를 중심으로 큰 폭 수수료를 깎아주는 안을 내놓는다는 방침이다. IBK기업은행의 자회사인 IBK연금보험은 지난달 DB형은 최대 0.25%포인트, DC형은 최대 0.1%포인트 인하했다. 미래에셋대우도 이번달 초 인하 대열에 동참했다.
김병덕 한국연금학회장은 “과거 고금리 시절에는 가입자들이 시장금리 수준의 수익률에 만족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저금리 때는 그렇지 않다”며 “금리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신상품 개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액 1위는 삼성생명으로 24조6140억원 규모(금융감독원 집계)다. 신한은행(19조640억원), KB국민은행(17조435억원), IBK기업은행(13조8316억원), KEB하나은행(12조6296억원), 우리은행(12조5716억원), 현대차증권(11조2734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