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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체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결집하여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현재까지 장교단의 사고와 신념체계로 정립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 선조들은 한반도에서 어떠한 사고체계를 형성하여 국방을 수행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지정학이 만들어낸 전쟁의 방식
한 나라의 작전적 사고는 단순한 군사적 기법이 아니라, 국토의 구조와 민족의 기질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집단적 이성이다. 독일은 사면의 협공 위협 속에서 ‘내선작전과 임무형 지휘’를 발전시켰고, 이스라엘은 사막의 포위 환경 속에서 ‘결정적 시점의 전투력 운용’을 완성했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반도의 좁은 공간과 세 방향의 위협, 짧은 종심은 지휘관으로 하여금 지형을 읽고, 시간을 다루며, 결심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한민족 특유의 즉응성과 융통성, 집중력이 그 사고의 속도와 감각을 결정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세력이 맞부딪히는 좁은 단층선이다. 북쪽은 산악, 남쪽은 해안과 섬, 중앙은 태백산맥이 남북을 갈라놓는다. 평야가 적고 종심이 짧아 대규모 기동보다는 지형의 이용과 순간적인 판단이 승패를 갈랐다. 이 구조는 세 가지 사고의 틀을 낳았다.
첫째는 지형 중심 사고로써 산과 강, 해협이 곧 전장의 틀이었다. 둘째는 시간 중심 사고로써 짧은 종심은 전투에서 시간을 다루는 능력을 요구했다. 셋째는 결심 중심 사고로써 좁은 전장일수록 지휘관의 판단이 전세를 바꿨다. 이 세 가지가 한국식 작전적 사고의 골격이다. 우리의 전쟁사는 화력의 역사가 아니라, 시간·공간(지형)·결심 중심으로 싸운 역사였다. 여러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가 선정한 예를 들어본다.
을지문덕·김유신·강감찬의 작전적 사고
서기 612년 수나라 양제는 1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병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전면 충돌 대신 후퇴와 유인전을 택했다. 그는 매번 싸우는 척하다가 사라지고, 다른 길목에서 매복을 반복했다. 수군은 평양에 가까워질수록 보급이 끊기고 사기가 무너졌다.
결정적 순간, 살수(薩水)에서 고구려군은 정면과 측면에서 협공을 감행했다. 수군은 진흙탕 강을 건너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수군 30만 중 살아 돌아간 자는 2만도 되지 않았다. 전장을 넓힐 수 없다면, 시간적 요소를 잘 활용함으로써 강자의 속도를 약자의 판단으로 통제하여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을지문덕은 공간의 제약을 시간의 운용으로 바꾸며 한국식 작전적 사고의 첫 모델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7세기 신라는 반도 남동단의 소국이었다. 서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 남쪽의 왜가 포위했다. 김유신 장군은 정면충돌 대신 시간을 벌고, 협력을 얻고, 전장을 분할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642년 대야성 함락 후 그는 반란 진압을 우선시하며 내부를 수습했다. 660년 백제 정벌전에서 주공은 사비를 향해 진격하고, 조공은 해상으로 보급선을 끊었다. 양동작전으로 적을 분산시키고, 결정적 시점에 전력을 집중했다.
고구려 정벌에서도 당군과의 협공 시점을 조율하며 후방 차단부대를 운용했다. 이는 오늘날의 합동작전개념과 유사한 사고였다. 전투력이 부족할수록 전장을 나누고,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하며 협동과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1019년 거란군 10만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진격했다. 강감찬 장군은 평양의 평야 대신 귀주의 협곡지대를 선택했다. 그는 일부 병력으로 후퇴를 가장하고 적을 좁은 회랑으로 유인했다. 좌우에 병력을 숨겨 두고, 적이 중앙을 파고들자 협공했다. 거란군은 후퇴로를 잃고 대혼란에 빠졌고, 귀주천에서 수만이 전사했다.
그는 지형의 제약을 과감한 전장의 선택으로 열세를 극복하였다. 전장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고, 적시적인 결심은 수세를 공세로 바꾸는 가장 큰 무기임을 입증한 사례이다.
한민족의 기원과 기질, 작전적 사고의 내면
한민족은 북방 알타이계 유목민과 동이계 농경민이 기원전 수천 년간 융합해 형성된 복합민족이다. 기동성과 정착성, 유연성과 공동체성이 한데 섞인 문화다. 즉, 움직이는 민족이면서도 버티는 민족, 끈기있게 준비하되 결정의 순간엔 빠르게 움직이는 성향이 태생적이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접점이다. 북쪽에서 유목적 활동성이, 남쪽에서 농경적 정착성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한국인의 기본 성향은 활동적이되 공동체적, 개인의 기동성과 집단의 연대가 공존한다.
세 가지 대표적 기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즉응성으로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고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후퇴전이 이러한 본능을 보여준다. 둘째, 융통성으로 계획보다 현실에 맞춰 판단과 결심을 바꾼다. 김유신 장군의 전선 조정, 외교와 전쟁의 병진이 대표적이다. 셋째, 집중성으로 위기 시 놀라운 결집력을 보인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더해 농경공동체의 유산으로 위기 시 지도자의 결단에 집단이 일제히 반응하는 문화가 있다. 이 특성은 명령보다 신뢰, 규율보다 공감에 기반한 결심형 지휘문화로 이어졌다. 요약하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이 작전적 사고의 틀을 만들었다면 한민족의 기질은 그 틀을 움직이게 했다. 외적인 압박 속에서 즉응·융통·집중의 본능이 작전적 사고의 감각이 되었다.
한반도는 대륙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이다. 중국에게는 방어선의 전초, 일본에게는 북진의 통로였다. 이 지정학적 구조 때문에 침입은 반복됐지만, 그 압박이 오히려 지휘관의 사고를 예리하게 만들었다. 좁은 전장은 넓은 사고를, 지속된 위협은 빠른 판단을 요구했다. 그 결과, 한국의 전쟁은 언제나 지형을 이용한 방어, 시간을 이용한 반격, 결심을 통한 역전의 형태를 띠었다.
한국형 작전적 사고의 세 가지 축
한국형 작전적 사고는 세 가지 축으로 발전해 왔다고 본다. 그것은 시간을 지배한 을지문덕 장군, 공간을 통합한 김유신 장군, 결심으로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를 바꾼 강감찬 장군에게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의 대군을 맞서 싸우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장악하여 후퇴와 유인을 반복하며 적의 리듬을 무너뜨렸고 결정적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김유신 장군은 다수의 전선을 분할하고 다시 연결하여 전장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운용했다. 국내 정세, 외교, 전투의 공간을 종합적으로 조율한 그의 전쟁관은 오늘날 합동·전영역 통합개념과 통한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대군을 협곡으로 유도한 뒤 결전을 치른다는 결심으로 주도권을 장악, 전세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즉 결심 중심 효과의 원형이 드러난 사례이다.
한국군의 작전적 사고는 지정학적 위치가 틀을 만들고, 한민족의 기질이 그 틀을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전장은 결심의 속도를, 험준한 산악은 지형 감각을, 세 방향(북·서·남)의 위협은 자율성과 융통성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한국의 전쟁은 언제나 지휘관의 판단과 시간 운용이 중심이 된 전쟁이었다.
오늘날 지형은 달라졌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형을 읽고, 시간을 통제하며, 결심으로 주도하는 사고. 이것이 반도의 지정학과 한민족의 기질이 빚어낸 우리식 작전술의 DNA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