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닷컴 제공] 지난 6일 밤 11시쯤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중앙도서관은 어김없이 소등됐다. 도서관 정문 옆에 세워진 5인용 텐트에서는 ‘24시간 열람실’ 쪽에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만 눈에 들어왔다.
‘성공회대 노숙모임 꿈꾸는 슬리퍼(sleeper)’ ‘가난하다. 난 학교에서 살아볼란다’ 등 텐트 밖의 라면박스에는 문패 같은 글이 적혔고, 옆에서는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THIS IS ENGLAND)’가 상영됐다. 이 학교 사회과학부 학생 4명이 노숙하는 현장이었다. 이따금씩 텐트 지퍼를 열고 얼굴을 들이미는 학생이 있었고, 집에 가다 잠시 영화를 보고 가는 학생도 있었다.
매주 수·목요일에 차리는 노숙 텐트는 지난달 14일 시작됐다. 2007년 입학한 정훈씨가 지난해부터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준비모임을 가져오다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 중에는 집이 서울에 있거나, 학교 앞에 자취방이 있거나, 부모가 대기업 사택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불꺼진 캠퍼스에서 노숙하는 이유는 대학생과 저소득층의 열악한 주거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다. 정훈씨는 지난해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 영상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 며칠간 실어증을 겪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들은 아직 경제적 독립이 쉽지 않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지만 이것저것 빼고 나면 잔액은 10만원 남짓. 주거 독립을 꿈꾸지만 허름한 고시원 월세조차 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 노숙은 “쓰러져도 기댈 곳 있다”고 또래들이 하고 싶은 목소리를 압축한, 자연스러운 선택이 됐다.
정훈씨는 텐트를 쿠션으로, 쿠션을 사회안전망으로 비유했다. 그는 “경쟁이 지배적인 가치로 자리잡은 한국사회에서 실패한 사람, 미끄러진 사람도 받아줄 수 있는 따뜻한 쿠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함께 노숙운동을 준비해온 민경씨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평화·반전 메시지를 공유하기 위해 벌였던 침대시위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들의 노숙 텐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누구든지 잘 곳이 필요한 사람들은 쉬어갈 수 있다. 특히 대학에 다니지 않는 수많은 20대와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고려대 등 다른 대학에서 동참하는 움직임도 있다고 전했다. 다만 노숙운동이 지나치게 이슈화·정치화되는 것은 싫다고 잘랐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는 새벽 4시 잠을 청하며 멈췄다.
노숙운동과 주거권 문제는 지난 5일 홍대입구역 근처 두리반에서 열린 ‘방 있어요?’ 간담회에서도 제기됐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씨는 “20대는 투표를 잘 안 하기 때문에 정치권력이 약할 수밖에 없고 기성세대는 이들에게 예산이나 세금의 방법으로 돈이 흘러가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며 “노숙운동이 주장하듯이 20대의 각성이 필요하고 정부와 지자체는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20대에게 월세보조금을 주거나 값싼 사회적인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는 “20대의 주거권 문제는 정신차리고 처음 맞이한 현실이라 아찔할 뿐, 10대에 이미 있었고 30·40대에도 계속되는 문제”라며 “정부는 주택을 공공재로 봐야 하며 대학교도 20대 주거문제 해결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