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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상 추분(秋分)인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무역보험공사 앞 거리. 트랙터 한 대와 사물놀이패를 앞세운 농민 수천 명이 구호를 외치며 종로 거리 일대를 행진했다. 종로 중앙버스전용차로(세종대로 사거리∼흥인지문 2.8㎞) 구간 공사 양 방향 2개 차로를 제외한 3개 차로를 차지했다. 형광색 조끼를 입은 교통경찰과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이들의 행렬을 조용히 따랐다. 경찰이 약속한 대로 시위현장에서 차벽과 물대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가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모임 ‘농민의 길’ 소속 농민 2000명(주최 측 추산·경찰 추산 1500명)은 교통경찰의 수신호에 맞춰 종로구청 방면에 있는 르메이에르빌딩 옆길로 들어섰다. 앞서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 앞에서 고(故)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대회 사전집회를 마친 뒤였다.
일순간 종로구청 인근 사거리가 추모대회에 참가한 농민들로 가득 찼지만, 5분도 채 안 돼 양 방향 교통흐름은 다시 원활해 지면서 우려했던 교통 정체는 빚어지지 않았다. 주말을 맞아 도심 나들이에 나선 시민도 이들 행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신기한 듯 이런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 백남기 농민 1주기를 이틀 앞둔 이날 오후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고인이 쓰러진 종로1가 르미에르빌딩 앞에서 ‘백남기 농민 뜻 관철과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부의 농업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농민헌법운동본부 발족을 선언하며 헌법 전문에 식량 주권의 문제 및 먹을거리의 기본권,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다원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호 농민의 길 상임대표는 이 자리에서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곳에서 우리가 제2의 백남기 농민이 돼 일어나자. 백남기 농민처럼 농민 헌법 쟁취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농민들은 막 추수한 벼 이삭 한 움큼을 든 채 고인을 추모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등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던 얼굴들도 다시 모였다. 이들은 “지난해 촛불혁명이 정권을 교체했다면 올해 촛불혁명은 헌법을 교체해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촛불 헌법을 완성하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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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측도 교통 경찰을 중심으로 교통 흐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안내에 초점을 맞추고 의경 투입을 최소화 하는 등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했다.
경찰은 앞서 지난해 화물차량 등을 동원한 전농의 상경 투쟁을 차단한 조치가 헌법상 기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 판단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교통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이상 트랙터 등 차량 시위를 제지하지 않기로 했다.
집회 장소 인근에 있는 D타워 측 관계자는 “사전에 집회가 실시된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이전과 달리 경찰이 차벽을 설치하지 않아 손님들이 불편을 겪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4살 된 딸과 함께 주말 나들이를 나온 김모(35)씨는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들이 서로 자극하지 않아서인지 예전과 달리 평화로운 분위기”라며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덕택인지 양측 모두 새로운 집회 문화에 적응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경찰은 이날 르미에르빌딩 주변과 추모 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 등에 총 39개 중대 3100여명의 경찰을 배치했지만, 집회 현장에서 차벽이나 물대포는 찾아볼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