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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국민이 뿔났다`..도심 휩쓴 촛불 열기

김보리 기자I 2008.05.30 12:17:41

고시 강행으로 촛불집회 최대 규모..촛불 거리행진으로 이어져
장례 두건 쓴 시민들도 집회에 참석
분노한 시민들 대통령·정부 비난 구호..물리적 충돌 없이 마무리

[이데일리 김보리기자] 한마디로 뜨거웠다. 서울 한복판은 쇠고기 장관고시 강행 소식을 듣고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 도심을 달구던 뜨거움과는 분명히 달랐다. 축제를 위한 환호성이 아니라 결기 가득한 얼굴에는 분노섞인 구호가 터져나왔다.




 
 
 
 
 
 
 
 
 
 
 
 
 
 
 
 
 
◇정부 고시 강행..분노한 시민들 광장으로 몰려
 
29일 오후 7시. 어스름이 깔리는 서울시청 광장앞.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22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이날 오후 정부가 논란 끝에 장관고시를 확정 발표한뒤 시민들은 삼삼오오 시청과 청계광장천으로 몰려들었다. 모여드는 시민들이나, 주위를 둘러싼 경찰이나 이날 행사가 어떤 사태로 번져나갈지 알 길이 없는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긴장감은 분노한 시민들의 구호로 깨졌다. `고시 철폐, 협상 무효`, `함께 해요 민주시민` 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경들과 마주쳤을 땐 `함께 해요, 민주 경찰`이라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시민들은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연행자를 석방하라`, `이명박 대통령 OUT` 등이 적힌 유인물을 들고 있었다.

지난 2일 이후 이어진 집회중 최대 규모였다. 촛불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과정을 지켜봐 온 국민들의 반발은 그만큼 컸고, 대통령과 정부를 향한 원망에는 날이 서 있었다.

◇촛불 들고 거리로..주도세력은 없어
 
오후 8시를 조금 넘어서자 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둘 일어섰다. 평소 같으면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가 밤 10시 가깝도록 진행되지만, 이날은 가두행진이 빨라졌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려는 시민들의 마음이 다급했던 탓이다. 참석자들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서 차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프라자호텔에서 신세계백화점 본점까지 갔다 방향을 돌려 서울 시내 곳곳에서 거리 행진을 벌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다양했다. 손을 잡은 젊은 연인들, 나란히 걷는 노부부, 아이를 목마로 태운 가장, 교사와 함께 나온 학생들, 하이킹 차림으로 자전거를 끈 채 대열에 합류한 시민들. 같은 구호를 외치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이들이었다.

거리행진은 구심점 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일행과 혹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느슨한 형태를 보였고, 구호도 일관된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들렸다. 걷다 지치면 도로 가장자리로 빠져 한참을 쉬다 다시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거리 곳곳에선 마치 마라톤 대회에서 처럼 물을 준비해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에게 생수병을 나눠 주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한 시민은 "매번 시위에 참가하는데 이렇게 누군가 중심 그룹이 없는 집회는 처음 본다"며 "그냥 산책하다가, 퇴근 중에 합류하는 분들도 많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 몇 몇은 행진을 계속하면서 31일 `국민 촛불 대행진`을 알리는 전단지를 거리 곳곳에 붙였다.

◇장례 두건 쓰고 "대한민국 현실 슬프다"..충돌없이 마무리
 
가두행진 속에서 시민들의 분노를 쉽사리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고시철폐와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쳤다. 장례식때 쓰는 삼베 두건을 쓴 한 시민을 만났다. 재테크 카페의 시샵으로 활동한다는 그는 30여명의 카페 회원들과 두건을 맞춰쓰고 집회에 참석하게 됐단다.

이유를 묻자 "대한민국의 현실이 슬퍼서 두건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행진 도중, 일부 시민들은 "청와대로 가자"며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동십자각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에 제지당하기도 했다. 일부는 중국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한국에 돌아오지 말라"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10시 20분이 되자 기자가 참가했던 행진은 광화문우체국 앞에 멈춰섰다. 경찰들이 진입을 막고 있는 상황. 참가자들은 경찰과 맞서서도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근 자진 연행까지 감수했던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은 광우병 국민상황회의의가 마련한 상황 방송에 따라 11시가 가까이 되도록 광화문 네거리에서 계속 구호를 외쳤다. 11시가 다가오자 31일 집회에서 다시 만나자며 이들은 자진 해산했다.

12시가 넘어, 경찰이 시위 참가자들의 청와대 및 미국 대사관행을 막기 위해 광화문과 조계사 쪽 도로를 전경차를 비스듬히 주차해 봉쇄했다. 길이 막혀 귀가를 못하게 된 일부 시민들은 전경차에 시위 유인물을 붙이며 차를 빼 줄 것을 요구했다. 한 시민은 "전경 동생들아, 쇠고기가 수입되면 가장 먼저 먹는 게 너희들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분노했지만 큰 충돌이나 물리적 마찰없이 이날 집회는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자정을 넘어 30일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광화문. 남은 500여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남아있었다. 경찰은 집회 참석자들을 조금씩 인도로 밀어내 해산에 나섰다. 장관 고시 강행으로 불붙은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은 내일을 기약한채 또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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