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아프간인 품은 진천은 평온했다…"우한교민 때랑은 다르니께"

이용성 기자I 2021.09.12 19:03:27

아프간 특별기여자들 10일부터 격리해제
한국 땅 밟은 지 2주 지난 현지 분위기 '덤덤'
작년 1월 '트랙터 동원 시위' 분위기와 달라
"그넘아들 전쟁 피해 왔는디 거절할 수 있나"
"히잡 부적절"…젊은층 사이에선 반대 여론도

[진천=이데일리 이용성 기자] 2020년 1월 29일 밤. 조용한 시골 마을인 충북 진천군 덕산읍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앞에 촛불 행렬이 등장했다. 주민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졌다.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이 인재개발원 정문을 막았고, 몇몇은 도로에 드러누웠다. “여러분의 우려가 기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강립 당시 보건복지부 차관(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물병이 날아왔다. 자리를 떠나려는 차관을 주민들이 둘러쌌다. 김 전 차관이 간신히 빠져나간 뒤에도 주민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촛불을 들고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정부가 코로나19 진원지인 중국 우한에서 우리 교민들을 데려와 인재개발원에 수용한다고 발표한 1년 8개월 전 얘기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이 9월 10일 오후 임시생활시설인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서 야외활동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아프간人 품은 진천...‘고요·평화’

탈레반의 협박을 받던 아프가니스탄인 390명이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한국땅을 밟은 지 2주째가 됐다. 진천은 우리 국민도 아닌 ‘외지인’을 또 다시 품었지만 1년 8개월 전 전대미문의 재난 공포에 질렸던 그때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현지 주민 상당수는 외모부터 문화까지 매우 다른 외지인들을 크게 이질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던 빈국이 생사의 기로에 선 온 외국인들을 구출했다는 자부심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자리했다.

특별기여자들이 2주간 자가격리를 마친 9월 10일, 이데일리가 찾은 진천 인재개발원 앞은 어수선함 없이 고요했다. 작년 트랙터가 점거했던 자리에는 ‘머무는 동안 편하게 지내다 가시기 바랍니다’ 등의 내용이 적힌 현수막들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인재개발원 정문에는 출입을 엄금하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돼 있었고, 외곽에는 수십명 규모의 경찰 기동대가 24시간 순찰을 돌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별다른 긴장감은 없었다. 경찰 기동대원들은 기자에게 “어떻게 오셨느냐”며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건네 오기도 했다.

자가격리를 마친 아프간인들은 숙소 밖으로 나와 야외활동을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엔 웃음과 활기가 번졌다. 히잡을 쓴 여성들과 남성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격리 생활 동안 수북히 쌓였던 먼지들을 털어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이날 오전 이곳을 찾아 특별기여자들에게 “아프간에서 대한민국을 도와주신 소중한 분들인 만큼, 타국에 와서 불편한 점은 많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발발 직후인 2020년 1월 29일 밤, 김강립 당시 보건복지부 차관(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중국 우한 교민들이 격리수용될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을 찾았다가 이에 반발한 주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사진=뉴스1)
◇토박이 진천군민 “우한 때와는 상황 달라”

인재개발원에서 5분 거리 민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아프간인 수용에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 대부분은 진천에서 태어나 진천과 함께 늙어가고 있는 토박이들이었다. 이들이 우한 교민 수용 때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 주된 이유는 정부의 ‘사전 교감’ 때문이었다.

정모(56)씨는 “우한 때는 정부가 일방적으루 결정하고 통보해 우리가 화가 많이 났던 거지”라며 “이번에는 사전에 정부 사람들이 내려와서 간담회나 설명회를 했고 일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는디, 설득을 여러 번 하니 동의한 거”라고 설명했다.

작년 1월 29일 ‘데모’에 참여했다는 서모(61)씨는 “정부가 그때 진천 안 온다고 그짓말(거짓말) 했었는디, 제대로 설명도 없이 결정하고 나서 ‘걱정 말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라며 “코로나가 뭔지도 잘 몰라서 무서웠던 때였는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니 들고 일어섰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을 직·간접으로 경험했기에 아프간인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이유도 크다. 진천 토박이 이모(87) 할아버지는 “우리도 6·25 사변 전쟁통에 난민이었자녀. 그넘아들도 전쟁 피해서 온 사람들인디 거절할 수가 있나”라며 “불쌍한 사람들인디 받아들여야지 뭐 방법이 있남. (수용을) 반대할 거였으면 벌써부터 난리가 났겄지”라며 웃었다.

9월 9일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머물고 있는 충북 진천 인근 민가의 풍경. 뒤쪽에 아프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이 보인다.(사진=이용성 기자)


일부 주민들은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비교적 젊은층이 모여 사는 충북혁신도시 거주자들이 주를 이뤘다. 진천 지역 주민들이 모인 맘 카페 곳곳에서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에 대한 불안과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40대 김모 씨는 “여성들 히잡을 쓰게 하는 등 종교적인 신념이 한국 문화와 맞지 않는다”며 “한국 문화를 따르지 않을 거면, 아프간 상황이 안정되는 즉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A(39)씨 역시 “이 사람들이 나와서 진천에 거주하면 우리 아이에게 문화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아프간인들 사정은 딱하지만, 진천사람들 사정을 먼저 챙겨야 한다”고 답했다.

◇진천군 향한 응원 쇄도…‘돈쭐’·후원 손길 이어져

이러한 가운데 진천군을 향한 응원은 쏟아지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돈쭐(돈+혼쭐의 합성어로 정의로운 일을 해 귀감이 된 가게의 물건을 팔아주자는 의미)’ 행렬과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충북 진천군의 온라인 쇼핑몰 ‘진천몰’은 주문 폭주로 지난달 29일 운영을 일시 중단했다. 진천군민이 특별기여자들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날부터 48시간 동안 평상시 주문 수량보다 20배 증가한 1500건의 주문이 접수됐고, 80% 이상이 첫 주문 고객인 것으로 파악됐다.

아프간인들을 도우려는 기부도 줄을 잇고 있다. 진천군 지역단체와 인근 음성군 소재 기업 등은 문구용품과 생활잡화 등을 기부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특별기여자들의 재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임직원 성금으로 조성된 나눔펀드 1억원을 대한적십자사에 건넸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10일 기준 후원금은 약 2억1000만원이 모였으며, 기부물품도 50여곳에서 약 2억2000만원 상당이 접수된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법무부는 교육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해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세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본격적인 교육은 건강검진·상담 등이 끝나는 오는 23일부터 시작된다. 정부는 이들이 10월 말까지 이곳에 머문 후 가족 단위 거주가 가능한 별도 시설로 이동해 본인의 희망과 능력에 따라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정착 교육을 진행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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