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권소현의 일상탈출)⑥아우슈비츠행 기차

권소현 기자I 2006.08.25 14:24:04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기차여행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인도에서의 기차여행은 고행이다. 그저 MP3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상상을 했다면 기차를 타는 순간 내리고 싶어질 것이다.

처음 인도 기차를 탔던 것은 아그라에서 고락뿌르까지 가는 15시간 짜리였다. 15시간 정도면 내겐 가뿐하다. 오히려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우중충한 싸구려 게스트하우스보다는 기차의 침대칸이 더 낫다는 생각도 한다.

작은 아그라포트역 1번 플랫폼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차를 기다렸다. 출발시간보다 한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덕에 지붕에 몇 개 안 달려 있는 선풍기 바로 아래에 운 좋게 자리를 잡았다. 거미줄에 먼지까지 잔뜩 엉켜 있는데다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돌아갔지만 푹푹 찌는 날씨에 살짝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고마울 정도다.


▲ 아그라포트역에서 고락뿌르행 기차를 탔다. 정차하는 동안 인도인은 기차에서 내려 느긋하게 화장실을 다녀오고 짜이를 사먹는다.
출발시각 밤 9시50분, 플랫폼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지고 인도인들은 선풍기 바람을 조금이라도 쐬보겠다고 슬그머니 밀고 들어온다.

밤 10시를 넘기고 11시가 다 되가는 데도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기차는 11시가 넘어서야 경적을 울려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플랫폼이 부산스러워진다. 짐꾼들은 자기 몸의 두배, 세배나 되는 짐을 부지런히 나르고 승객들은 자신이 탈 객차를 찾느라 우왕좌왕이다.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 모양새를 보니 거의 인간 나르는 화물차 수준이다. 문마다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이 매달려 있고 내부를 들여다보니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몸이 딱 얼어붙었다. 저 기차를 과연 탈 수 있을까. 쌀 가마니 같은 배낭을 둘러 메고 기차에 올랐다. 복도는 거의 입석표를 산 인도인들에 의해 점거당해서 한발짝 앞으로 움직이는게 무척 힘들다.

▲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가 이렇게 생겼을까. 시트는 낡아서 여기저기 뜯어져 있고 침대는 녹슨 쇠사슬로 연결돼 있다.
이들을 제치고 어렵사리 좌석을 찾았다. 분명히 내 자리가 맞는데 누군가가 앉아있다. 그것도 5~6명이 다닥 다닥 붙어서 말이다. 한 사람이 누워서 잘 침대석이라 길기는 했지만 성인 남자 5~6명이 앉기에는 아주 좁은 자리인데다 거긴 분명히 내 자리였다.

앞에 서서 객차 번호와 좌석번호, 그리고 기차표를 번갈아가면서 확인했다. 그 사이 내 자리에 앉아있는 인도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이 낯선 이방인들에게 집중됐다. 제발 이 자리 주인이 아니었으면 하는 표정이다.

표를 보여주니 그래도 순순히 일어난다. 한국인 여자 4명이 그렇게 먼저 앉아있던 인도인들을 몰아내고 자리에 앉았다.

인도 기차의 침대칸은 상층, 중층, 하층 등 3개의 침대가 있고 한 컴파트먼트에 6개의 침대석이 있다. 복도 건너편에는 가로로 2층 침대가 있다. 유럽의 기차처럼 문을 닫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칸막이도 없고 모든 공간은 트여있다.

주변에는 모두 인도인. 특히 검은 피부에 흰 눈만 보이는 인도인 투성이다. 역시 이번에도 원숭이 구경났다. 자리를 비켜주기는 했지만 먼저 탄 인도인들이 구석구석 짐을 구겨 넣어놓은 상태라 배낭 놓을 자리조차 없다.

바닥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벽에는 바퀴벌레가 아무렇지 않게 기어 다닌다. 인도 바퀴벌레는 정말 엄지손가락보다 더 큰데다 도통 사람을 무서워하는 눈치가 아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바퀴벌레의 출현과 동시에 앰뷸런스 사이렌 버금가는 괴성을 질러댔겠지만 이미 인도 도착 몇 일만에 이 정도는 충격축에 끼지도 않을 만큼 면역력을 길렀다.

정말 그대로 돌아서 내리고 싶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을 가득 태운 기차가 이랬을까 싶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찜통이고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도 뜨거운 바람을 쏟아낸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침대석에 두 명이 서로 엇갈려 누워 자기도 하고 살 맞대고 포개어 앉아있기도 한다.

일단 앉아서 가기로 하고 배낭을 의자 끝에 놓아 복도로부터 바리케이트를 만든 다음 나란히 앉아 발을 건너편 의자에 쭉 뻗었다. 기차는 덜컥 거리면서 아그라포트역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니 창을 통해 바람이 들어온다. 선풍기 바람보다는 낫긴 한데 먼지까지 같이 들어와 끈적끈적한 몸에 딱딱 붙는다.

한 남자가 눈치를 한참 보다 끝에 조금 걸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가차없이 '노! 노노노'라고 답하고 애써 모른 척 한다. 자리 한구석을 허용하면 인도인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게 뻔하기 때문이다.

졸음이 점점 쏟아진다. 이제 각자 침대석을 만들어 어찌 됐든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등받이를 올려 3층 침대칸에 붙어있는 체인으로 고정시키면 2층 침대석이 만들어진다.

▲ 옆 사람과 철사망을 사이에 두고 마주봐야 하는 3층 침대석 풍경

3층 침대석으로 기어올라가 누웠다. 천장이 바로 눈 앞이다. 그런데 몸을 옆으로 돌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부동자세로 자게 생겼다. 돌렸다가는 바로 옆 컴파트먼트의 같은 층 침대에 누워있는 시커먼 인도 남자와 철사로 된 망을 사이에 두고 불과 10cm 간격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큰 배낭은 기둥에 체인으로 둘러 자물쇠로 잠그고 작은 배낭은 베게 삼아 누웠다. 그러다가 스스르 잠이 든 모양이다. 중간중간 흐르는 땀 때문에 깨서 물티슈로 닦고 또 잠이 들고..

기차는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고락뿌르에 도착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에어컨 나오는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외쳐댔다. 기대에 부풀었던 첫번째 인도 기차여행은 이렇게 고강도 극기훈련으로 끝났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가 있듯 기차에도 등급이 있다. 크게 에어컨이 있는 칸과 없는 칸으로 나뉘고 에어컨 기차는 다시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분류된다. 에어컨 없는 기차는 침대칸(SL)과 소나 염소도 같이 탄다는 2등석이 있다.

처음에 뭣도 모르고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탄다는 SL을 끊었다. 혹서기에 인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생각치 않았던 탓이다.

고락뿌르행 기차를 탄 이후로는 다시 기차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 결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인도에서 기차만큼 각 도시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철도망이 단일 회사인 인디아 레일웨이즈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곳이 인도다. 철도의 길이는 거의 6300km에 달하고 역은 7000개나 된다. 인디아 레일웨이즈 직원수는 154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매일 1만1000개의 기차가 운행되며 매일 1300만명의 승객이 기차를 이용한다.

▲ 에어컨 없는 기차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 재미가 쏠쏠하다.

콜카타에서 바라나시로 이동키로 하고 기차를 제외한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봤다. 버스는 아예 없고 비행기는 델리까지 갔다가 갈아타고 다시 온 길을 돌아와야 하는 복잡한 노선이다. 어쩔 수 없이 또 기차를 탔다.

대신 이번에는 에어컨 기차를 타기로 했다. 에어컨 3등칸 가격이 SL에 비해 3배 정도 비쌌으니까 비싼 값을 하겠지 싶었다.

정말 에어컨 기차는 사뭇 달랐다.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나오는데다 기차 내부도 비교적 깨끗하다. 타자마자 깨끗한 시트와 베게를 나눠준다. 바퀴벌레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끼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 정도여서 귀엽다는 생각까지 든다.

기차값이 비싸서 그런지 타는 승객들도 어느정도 수준이 있어 보인다. 하얀 피부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산층들이 대부분이라 안심이 된다.

그 이후로 나는 기차여행을 즐기게 됐다. 물론 무조건 에어컨 칸으로 끊었다. 일단 타면 시트를 깔고 배낭을 머리맡에 놓아 누워 잘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기차가 출발하면 책도 보고 일기도 쓰고 이런 저런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졸리면 잠을 청하고, 자다가 깨면 기차타기 전에 왕창 사두었던 음식을 먹으며 또 책을 보거나 일기를 쓴다.

▲ 침대 기차에 누워 곤히 잠든 인도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도 기차여행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이 시간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 아뭏튼 이렇게라면 20시간 30시간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에어컨 기차는 창문이 짙게 썬팅돼 있어서 바깥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없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게 인도 냄새구나 하고 느낄 수도 없다는게 아쉬웠다. 다음에는 겨울에 인도를 찾아 더위의 방해를 받지 않고 SL등급을 타보리라.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