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문제로 러시아에 싫은 소리를 하기 힘든 유럽 정상들이 해결사를 자처했다. 러시아와 유럽 양 측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예상보다 쉽게 문제가 해결됐다. 특히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외교술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에게 전쟁은 현재진행형. 외국 자본의 엑소더스라는 강력한 역풍이 실물 경제에 악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증거들이 포착되고 있다. 정치적 영향력을 증명하는데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러시아는 이번 전쟁의 패자다.
◇ 증시·루블화 폭락..`유동성 말랐다`
지난 밤 러시아 주식시장은 급락했다. RTS 지수가 전일 대비 7.5% 하락하는 등 2006년 6월이후 최저점 수준까지 밀려났다. 브라질과 함께 떠오르는 투자처로 주목을 받았던 러시아 증시가 지난 5월이후 40% 이상 급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나 시장 전문가들은 그루지야 침공 이후 시작된 외국 자본의 이탈이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외국 투자자들이 지정학적 불안으로 인해 러시아 시장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시중의 유동성이 완전히 메말랐다는 분석이다.
지난 주에는 외환시장에서 루블화 가치가 폭락해 중앙은행이 대규모 시장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4일 루블화가치가 유로/달러 바스켓 방식을 채택한 2007년 2월이후 최저치까지 밀려, 중앙은행이 35억~40억달러를 투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근들어 루블화 폭등을 막기위한 개입에 바빴던 점을 되새겨보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관련기사 ☞러, 루블화 폭락 막아라..대규모 시장개입
주요 외신들은 시장 전문가들을 인용해 그루지야 전쟁이 시작된 이래 200억달러 이상의 자금이 러시아 시장을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외국 자본 유출 규모가 50억달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시장에선 이를 믿지 않는 분위기다.
◇ 그루지야 `후폭풍`..신용경색 시작됐다
문제는 외국 자본의 이탈로 러시아 은행들이 대출을 옥죄기 시작하면서 그 충격이 실물 경제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 러시아 은행가들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분위기를 전하며 `1998년 디폴트 이후 최악의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의 한 은행가는 "정부가 돈을 얼마나 갖고있는지 모르지만 민간 부문의 자금은 완전히 메마른 상태"라며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유동성 부족 현상이 올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고 우려했다.
증시 급락으로 주식시장의 자본조달 능력이 약해졌고 은행까지 대출 제한에 나서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점점 커지고 있다.
게다가 시장에 큰 돈을 투자했던 대부계 거부들은 증시 급락으로 `마진콜`을 받게 생겼다. 선물계약 기간 중 선물가격이 크게 변화함에 따라 추가로 은행에 증거금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 기업의 `제2의 돈줄`까지 제 기능을 못하게 됐다.
세르게이 사이도브 유니크레딧 자본시장 담당헤드는 "과도한 레버리지를 노렸던 투자자들이 대거 매도 압박에 직면했다"며 기업들은 자금 확보에 있어 어떤 대안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부동산 개발업과 소매업이 큰 타격을 받게될 것으로 전망했다.
◇ 상품가 하락 등 위험요인 산재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상황도 녹록치 않다. 미국의 경기둔화가 전 세계 경제로 확산되는 분위기이고, 유가를 비롯한 상품가격도 하락하는 추세. 러시아로서는 그간 고도의 성장세를 가능케 한 모든 기둥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셈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주말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최대 2000억달러의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주택경기 둔화로부터 시작된 미 경기둔화를 막아보겠다는 과감한 `해법`을 제시한 셈이지만, 경기둔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득세하고 있다.
상품가격 하락세도 러시아에 부담이다. 허리케인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고 세계 경기둔화에 대한 우려는 커지면서 유가를 비롯한 상품가격이 일제 하락중이다.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결렬 소식에 앞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인 점도 악재로 작용했다. 관련기사 ☞(Commodity Watch)유가 급락..상품시장 먹구름
러시아 최대 민영은행인 알파뱅크의 인 요르 아벤 사장은 "러시아 경제가 경기둔화의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며 "인플레가 가속화되고 실질 임금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로써 예상과 달리 푸틴의 강경노선을 그대로 밟아왔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신임 대통령은 취임이후 최고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미국은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에 속수무책이었지만, 시장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