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주부들, 중독의 늪에 빠지다

조선일보 기자I 2006.08.30 12:07:00

텅 빈 마음 채워주는 건 너 뿐이야 …

[조선일보 제공]



주부 강모(38)씨는 아이들이 등교한 뒤부터 마음이 분주해진다. 초등학생 딸이 돌아오기 전 얼른 집안 일을 끝내고 헬스클럽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에서 하루 3~4시간씩 운동을 한다. 외출을 하다 운동을 거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나고, 불안·초조감이 몰려와 약속을 취소하고 헬스클럽에 간 적도 있었다. 강씨는 “운동을 시작할 땐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쳤는데, 요즘에는 친구 만나는 것도 싫고 자꾸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보험회사 영업사원 한모(42)씨는 지금까지 성형수술을 다섯 번 받았다. 처음 보험 일을 시작할 때 콧방울이 넓은 게 촌스러워 보여 코 수술을 받았더니 중요한 계약이 성사됐다. 그 뒤 눈, 이마, 가슴 등 성형 수술을 받을 때마다 실적도 올라갔다. 올 10월에도 턱 깎는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한씨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바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쇼핑 ·도박 ·성형 등에 빠진 주부들 … 원인은 스트레스

‘중독’의 바다에 빠진 위기의 주부들이 늘고 있다. 마약이나 알코올과 같은 화학적 중독이 아니라 쇼핑, 도박, 섹스, 운동, 성형, 인터넷 등과 같은 행동 중독이다. 전문 용어로는 ‘행동과잉장애(BEDs, behavior excess disorders)’라고 한다. 점점 내성이 생겨 더 강력하고 즉각적인 자극을 추구하게 되고, 끊을 경우 금단증상이 온다는 점에서는 화학적 중독과 다를 바 없다.

‘현대병’으로 불리는 이와 같은 생활형 중독은 따져보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 강북삼성병원 도박클리닉 신영철 교수는 “뇌에 있는 쾌락·충동을 담당하는 회로가 선천적으로 부실하거나 어릴 때 잘못 형성돼 신경전달물질에 불균형이 생길 경우 쉽게 중독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충동성 및 판단력과 관련이 있는 전두엽 부위의 이상에 의한 뇌신경질환이라는 외국의 보고도 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주부들이 생활형 중독에 많이 노출될까? 단국대병원 정신과 백기청 교수는 “학계에서는 쇼핑중독자 중에서 많게는 60~70%까지 우울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며 “쇼핑중독, 운동중독, 섹스중독 등과 같은 행동과잉장애의 상당 부분은 애정결핍, 불안, 우울증, 소외감 등과 같은 개인의 내면 심리적인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말했다.

주부들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도 중독을 부추긴다. 부천 성가병원 정신과 김대진 교수는 “남편과의 불화, 자녀와의 갈등, 시부모와의 관계 등 일상에서 누적된 스트레스가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해서 도박이나, 쇼핑 등 쾌락과 관련된 일을 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물론 개인의 성격적인 요인도 있다. 무엇인가에 빠지면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탐닉형 성격, 문제가 닥치면 피하고 보는 ‘회피형 성격, 의존형 성격 등이 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다.

주부들의 이와 같은 생활형 중독은 대인관계 기피나 가족관계의 문제 등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으며 때론 다른 정신과적 질환들을 수반하기도 한다. 삼성서울병원 스포츠의학센터 박원하 교수는 “사회적으로 관대한 운동중독조차 때론 섭식장애나 우울증, 대인기피증 같은 문제를 동반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도박이나 쇼핑, 성형 중독의 경우 경제적 손실과 그에 따른 후유증도 엄청나서,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경우도 많다. 운동중독자 중에선 골절 같은 부상이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운동을 시작해서 건강을 부상이 악화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생활형 중독 또한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독 기간이 길어질수록 인격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오종민 교수는 “알코올 중독자가 자신의 중독을 부정하듯 생활형 중독자들도 대부분 자신이 중독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가족들의 도움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독 치료의 출발점이다”고 말했다.

아내가 혹시 쇼핑중독?
주부 생활형 중독 유형

◆ 운동중독: 1주일에 7일, 하루에도 종종 두 번씩 운동하는 경우 운동중독이 의심된다. 운동에 중독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진통제의 수 십 배에 달하는 효과를 지닌 베타엔돌핀 때문. 운동을 할 땐 천연 마약의 일종인 베타엔돌핀이 분비돼 통증과 스트레스를 잊게 한다. 또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돼 우울증이나 불안을 해소하므로 중독된다는 설명도 있다. 부상이나 다른 정신과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증상이 심하면 전문가 상담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 도박중독: ‘병적 도박’이라고 불리며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약 4% 이상에게 나타나며,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많다. 항우울제나 알코올 중독에 쓰이는 일부 약물이 도박에 대한 욕구와 갈망을 현저히 줄여준다. 이밖에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 잡아주는 인지행동치료와 정신과적 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도박중독클리닉의 집단치료도 효과가 좋다.

◆ 쇼핑중독: 충동조절장애나 강박장애에 속한다. 충동이나 감정 조절에 관련되는 세로토닌, 도파민 등의 아편성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에 기인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성장 환경이나 심리적 요인도 상당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는 외로움, 우울증, 상실감, 열등감, 애정결핍, 공격적 충동, 보상심리 등이 쇼핑으로 표출될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체면 중시 경향과 물질만능주의 풍조 탓도 있다. 쇼핑중독의 정도, 쇼핑에 매달리는 이유 등을 분석하고 쇼핑기록지를 적어 쇼핑행태를 파악하여 전문가와 함께 쇼핑충동을 극복하는 인지행동치료가 효과가 좋다.

◆ 성형중독: 당연히 외모에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 성형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다.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인데도 자신의 외모를 기형적이라고 생각하며 성형수술을 일삼는 이들 중에는 ‘신체변형장애(BDD·body dysmorphic disorder)’ 환자들도 있다. 이들은 반복해서 거울을 보거나 결함을 숨기려 들며, 남들이 놀릴까봐 밖에 나가지 않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한 성형중독은 치료가 어려우며 성공률 또한 높지 않다.

◆ 섹스중독: 최근 이스라엘 연구팀은 도파민(뇌세포 흥분 물질)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의 유전자 때문에 섹스 중독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애정결핍이나 성적 억압 등도 영향을 미친다. 요즘은 사이버 섹스중독도 문제. 특히 주부들의 경우 익명성과 편리성이 보장된 사이버 섹스를 통해 억압돼온 성적 욕망을 표출하기가 쉽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 인터넷 중독: 인터넷을 하지 않을 때도 화면에서 본 영상이 떠다니며, 두뇌의 시간왜곡이 생겨 인터넷을 한 지 1시간이나 됐는데도 1분처럼 느껴진다면 인터넷 중독일 가능성이 크다. 중독의 유형은 게임, 사이버 섹스, 채팅 같은 사이버 관계, 과잉 정보수집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정보수집보다는 네트워크 게임이나 사이버 채팅의 중독성이 훨씬 크다. 현실의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므로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나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치료해야 한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