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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th SRE]금융지주 신용등급, 은행과 같아?

김도년 기자I 2013.05.22 11:00:06

[이슈]정부지원 가능성 낮은데도 같은 등급 '논란'

[이데일리 김도년 기자] 가진 논과 밭을 모두 팔고 빚까지 얻어 자식을 키운 국가유공자 아버지가 있다. 자식은 훌륭한 사업가로 자랐고 정기적으로 아버지에게 돈을 부쳐준다. 아버지는 이 돈으로 빚을 꼬박꼬박 갚는다.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면 국가와 자식은 아버지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쳐 자식까지 어려워지면 정부는 수많은 종업원이 딸린 자식부터 구제할 가능성이 크다. 자, 그럼 아버지와 자식의 신용도는 똑같이 볼 수 있을까? 비슷한 고민은 크레딧 업계에서도 벌어진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피치는 우리금융지주의 선순위채 신용등급을 우리은행보다 한 단계 낮은 ‘A2’, ‘BBB+’로 매기고 있다. 신용등급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두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정부가 어디를 우선 지원하겠느냐는 이른바 ‘정부의 지원 가능성’이다. 피치는 정부 지원 가능성을 1~5순위 사이에서 정하는데 우리은행은 1순위로, 우리금융지주는 이보다 낮은 2순위로 매기고 있다. 해외에선 정부의 지원 가능성이 높은 은행의 신용등급을 금융지주사보다 더 높게 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NICE신용평가 등 우리나라 신용평가 3사가 보는 시각은 이와 다르다. 3곳 모두 우리금융과 KB금융, 신한금융, 하나금융 등 국내 금융지주회사의 신용등급을 자회사 은행과 같은 ‘AAA’로 주고 있다.

17회 SRE에 참여한 크레딧 전문가들은 신평사들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설문 응답자 109명 중 금융지주사에 은행과 똑같은 신용등급을 주는 데 동의한 사람은 10명(9.2%)에 불과했다. 나머지 99명은 은행과 다른 별도의 신용등급을 매기거나, 같은 신용등급을 매기더라도 정부 지원 가능성 등을 배제한 독자 신용등급을 명시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현재의 신용평가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적인 셈이다.

한 SRE 자문위원은 “설문 결과를 보면 신평사들이 금융지주사와 은행의 신용등급을 똑같이 매기는 지금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며 “해외 신평사와 같은 논리대로 금융지주사의 등급을 내리거나 독자등급을 따로 주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국내 신평사 “등급 다를 이유 없다”

금융지주사에 대한 신용등급 논란은 과거 금융지주회사가 출범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있었지만, 국내 신평사들이 등급을 매기는 방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신평사들은 국내 금융지주사와 계열 은행은 정부의 지원 가능성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보고 있다.

씨티그룹 등 해외 금융지주사들은 본국은 물론 해외 곳곳에 현지 법인을 두고 있는 탓에 위기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수가 많다. 가령 미국 정부가 본국의 금융지주사를 통해 자회사들을 지원할지, 대형 계열 은행부터 지원할 지, 각 나라에 퍼져 있는 계열 현지법인은 현지 정부가 얼마나 책임감있게 지원해 줄 것인지 등 금융지주사 신용평가를 하기 전 고려해야 할 복잡한 경우의 수가 많을 수 있다. 자기 사업을 하지 않는 순수지주사의 신용도는 자회사들의 신용도를 모두 더한 값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개별 자회사들의 상태가 모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 있어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금융지주사들은 해외에 진출한 현지 법인이 거의 없는 데다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복잡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신평사들의 공통된 견해다. 은행이 곧 금융지주사이고, 금융지주사가 곧 은행이기 때문에 등급을 달리할 이유를 못 찾겠다는 논리다.

정문영 한기평 연구원은 “우리나라의 금융지주사 계열사는 대부분 국내 시장에서 영업하고 있고, 은행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은행 계열사의 비중이 절대적인 만큼 굳이 지주사의 신용등급을 은행과 다르게 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며 “현재 우리나라 금융지주사들의 신용등급을 굳이 한 단계 내려야 할 만큼 재무상태가 나쁘지도 않다”고 설명했다.

◇“지주사 채권, 은행 예금보다 후순위”

하지만 크레딧 업계의 반론도 만만찮다. 금융지주사에 돈을 빌려 준 채권자는 계열 은행 예금자보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순서 면에서 뒤지는 후순위 채권자에 해당한다. 또 위기 시 정부가 예금보험공사(예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공공기관을 동원해 은행부터 지원하는 현실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빌려준 돈을 떼일 확률은 금융지주사가 은행보다 더 높은데 이를 등급에 반영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한 SRE 자문위원은 “금융지주사 채권자들은 금융당국이 은행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지주사로 흘러들어 가는 배당을 금지하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자기 사업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배당까지 규제하면 사실상 채권자들에게 줄 이자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워진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금융당국은 은행에 대한 엄격한 자본 규제인 바젤III 도입을 앞두고 은행의 고배당을 자제시키고 있다. 금융당국 수장이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을 불러 직접 주문할 정도라면 채권(지주회사채) 고유의 선순위성이 자회사인 은행에 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신평사들은 국내 금융지주사들의 부채비율 등 재무적 지표가 우려스러울 만큼 나쁘지 않다고 재반론을 편다. 우리, KB, 신한 등 대다수 국내 금융지주사들의 이중 레버리지 비율(자회사출자가액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값으로 100%가 넘으면 부채가 많다는 의미)은 금융당국의 지도기준인 130%를 밑돈다. 이 정도면 경영평가등급 상으로도 1등급에 해당하는데 굳이 등급을 내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금융당국은 어디부터 지원?

크레딧 업계에선 ‘정부의 지원 가능성’ 여부를 놓고 금융지주사의 신용등급을 내리느냐 마느냐를 10여 년 넘게 다투고 있지만, 정작 정부가 이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점은 아이러니다. 정부가 금융지주사와 계열 은행 사이에서 어디를 먼저 지원해야 하느냐를 고민할 날이 온다면, 그런 상황 자체가 대공황에 준하는 위기인 만큼 어디를 먼저 지원할지는 일단 닥쳐봐야 알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정부도 보호해야 할 예금자들이 있는 은행을 먼저 지원해야 한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사견을 전제로 “국내 경제 시스템 전반에 위험이 전이되기 쉬운 곳(은행)부터 지원하는 것이 순리에 맞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SRE 자문위원들은 금융지주사의 신용등급을 굳이 나쁘게 매겨야 한다는 게 아니라 계열 은행과 달리 매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재무지표가 나쁘지 않더라도 지주사와 은행의 각각 속성이 반영될 필요가 있고, 해외 신평사들의 방식을 참고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등급을 달리 매길 근거에 대해 우리나라 신평사들이 큰 틀에선 동의하고 있는데도 등급을 조정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신평사와 발행회사들의 회사채 영업 논리 때문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한 SRE 자문위원은 “금융지주사의 등급을 내릴 수 없는 것은 신평사와 채권 발행회사, 투자자 사이의 현실적인 타협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등급이 떨어지면 위험가중치가 오르기 때문에 ‘AAA’ 채권만 운용하는 투자자들의 수요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지주사 내부 관계자도 “지주사 신용등급을 내리면 지주사 채권 수요가 줄어들 수 있어 함부로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기사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17th SRE’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17th SRE는 2013년 5월15일자로 발간됐습니다. 책자가 필요하신 분은 문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의 : 02-3772-0161, mint@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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