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호식기자] 국내 반도체업계에 기술유출 논란이 한창이다.
하이닉스(000660)가 국내 업체들이 올해 양산에 들어가는 54나노급 양산기술을 대만업체에 제공하는 협상을 진행중이라는 소식이 발단이 됐다. 특히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을 이끌고 있는 황창규 사장이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논란이 뜨거워졌다. 하이닉스가 기술이전을 결정하고, 정부가 이를 승인할 것인가를 최종 결정하기 이전에는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하이닉스의 기술이전 문제를 놓고, 반대하는 측의 '반도체 서진론'과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국내업체 고립론'이 맞붙고 있어 주목된다.
◇반도체 서진론(西進論)
인류 문명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 발상지에서 시작돼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로 넘어간다는 문명서진론(文明西進論)을 빗댄 말이다.
반도체 중심국가가 미국에서 시작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넘어왔고, 자칫 대만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미국은 1970년 인텔의 1K D램 개발로 메모리반도체 선도국가가 됐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던 1978년 일본 히타치가 16K D램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업체들이 양산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시장을 공략해 역전을 시켰다.
메모리반도체를 주도하던 일본 또한 1994년 삼성전자의 256M D램 개발에 일격을 당해 한국에 맹주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반도체 주도권은 채 20년도 안돼 바뀌어왔고, 이는 치열한 기술개발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업체의 주요 기술이 대만업체인 프로모스에 넘어갈 경우, 향후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대만업체로 반도체 주도권이 넘어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게 '반도체 서진론'이다. 미국이 일본에, 일본이 한국에 주도권을 넘겨준 것은 '기술 부메랑'을 생각지 못했던 패착 때문이라는 논리다.
◇국내 반도체 고립론(孤立論)
이 주장은 54나노 양산기술이 기술유출이 아니라는데서 출발한다. 하이닉스가 "협의중인 기술은 선행기술이나 설계기술이 아닌 양산기술일뿐"이라거나 "그동안 양산기술을 이전해준 프로모스가 이를 기반으로 다음세대 기술을 개발한 흔적은 없다"고 주장하는게 그 이유다.
이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기술유출이라는 감성적인 주장에 막혀 타이밍을 놓칠 경우, 고립(孤立)만 자초할 것"이란 논리다.
현재 세계 메모리반도체 업계는 기술개발이나 생산 등에서 합종연횡이 활발하다. 앞선 기술을 가진 업체는 다른 업체에 양산기술을 제공, 기술료를 받아 앞선 기술개발에 재투자하고 생산원가 절감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이닉스는 이처럼 국경을 뛰어넘는 합종연횡속에 한국 업체만 고립무원에 놓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달리 이같은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미국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와 협상중인 대만 프로모스에 54나노급 기술이전을 제안했다는 대만 매체의 보도가 나왔다. 이에 대해 '고립론을 반증하는 또 다른 사례'라는 주장과 '협상이 유리하게 이끌려는 대만업체들의 작업(?)'이라는 해석이 맞서고 있다. 승인권을 갖고 있는 정부는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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