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유통업은 3D직종입니다

이학선 기자I 2013.10.22 10:52:42

'30분 넘게 고르더니 환불해달라', '책임자 불러' 등 10명중 6명 진상고객 스트레스
미스터리 쇼퍼·카카오톡 등 상시감시 노출..시급제 아닌 분(分)급제도 적용

[이데일리 이학선 기자] #서울 성동구 소재 한 대형마트 지하 직원 휴게실. 의자에 앉은 직원 10여 명이 신발을 벗은 채 두 발을 쭉 뻗고 있다. 한쪽 다리를 올려 종아리를 주무르거나 두 다리를 번갈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간혹 외부인이 드나들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렇게라도 뭉친 다리를 풀지 않으면 1시간30분 동안 서서 근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백화점 수입 명품화장품 코너에서 근무하는 박 모(27)씨. 30대 중반의 한 여성이 조금 전 고른 5만원대 아이섀도를 환불하자 속에서 욱하는 게 치밀어올랐다. 이 여성은 사지도 않을 마스카라와 파운데이션 등을 30분 넘게 꼬치꼬치 캐묻고 메이크업까지 받고는 아이섀도 하나만 구매해갔다. 박 씨는 환불을 요구한 고객에게 ‘해도 너무 한 것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 대형마트 여성 근로자가 팔레트 위에 쌓인 짐을 옮기고 있다.(홈플러스노동조합 제공)
유통업계 종사자들의 애환이 깊어지고 있다. 대형마트는 추석 이후 매출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각종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백화점은 가을 정기세일에 매진하면서 고충을 토로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백화점 의류매장에 근무하는 김 모(26)씨는 지난 21일 세일이 끝난 뒤 꿀 맛 같은 정기휴일을 맞았지만, 그간의 피로 탓에 오후가 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 씨는 “부모님은 번듯한 백화점에서 근무한다고 좋아하시지만, 누군가 백화점에서 일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푸념했다.

유통업계 종사자들의 가장 큰 고충은 이른바 ‘진상(진짜 밉상의 준말)’ 고객에게서 발생한다. 지금은 막을 내렸지만, KBS 개그콘서트의 ‘정여사’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종사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코너로 꼽힌다. 백화점 의류매장 관리를 맡았던 최 모(37)씨는 “말도 안되는 요구에 ‘그건 어렵다’며 정중히 답변해도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그 사람 불러오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칠 때의 난감함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미스터리 쇼퍼의 존재도 직원들에게는 스트레스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근무하는 성 모(25)씨는 “진상고객 뺨치는 미스터리 쇼퍼에 회사 다닐 맛이 안날 때도 있다”며 “직원들을 감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영진의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상품판매원·전화상담원의 감정노동 실태’ 보고서를 보면 상품판매원의 10명 중 6명이 고객의 무리한 요구를 경험했고, 인격무시성 발언을 들은 비율도 42%에 달했다. 전화상담원은 32%가 성희롱을 당한 경험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찬임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감정노동자는 ‘일하는 내내’ ‘어떠한 경우라도’ 조직이 필요로 하는 감정과 태도를 표현해야 하고, 그 표현 여부를 늘 감시당하고 있다”며 “그 강도는 일이 주는 일반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보다 훨씬 세다”고 분석했다.

근무환경도 유통업 종사자들의 사기를 꺾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 대형마트는 계약직과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 사원에 대해 시급제가 아닌 분(分)급제를 적용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대형마트가 맺은 근로계약서를 보면 하루 근로시간은 8시간이 아닌 7시간20분 등 10분 단위로 돼 있다.

회사측은 “근로기한이 정해진 계약직 근로자는 현행법상 주 40시간 미만 근로계약만 체결할 수 있어 10분 단위로 맺었을 뿐”이라고 “법 테두리 안에서 계약을 체결한 것이라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회사 노조는 “하루 7.5시간의 근로계약을 가정하고 30분씩 더 일한다고 할 때 회사는 연간 110억원 이상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사측이 편법적인 근로계약으로 직원들의 임금을 편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엔 카카오톡이 유통업계 종사자들의 족쇄가 되고 있다는 하소연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모 대형마트 직원은 “쉬는 날에도 ‘카톡카톡’ 울려대는 판에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그룹방을 나가고 싶지만, 눈치가 보여 답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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