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만 해도 제가 살던 서울 청담동은 '농촌지역'에 가까웠습니다. 주변에서 '피자'라는 걸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간혹 '시내'에 나가서 피자를 사먹었다는 '있는 집 아이'의 말에 따르면 당시 최고의 도시락 반찬이었던 소시지가 잔뜩 올라간 빈대떡 같은 빵이라고 하더라고요. 누구네 아버지가 그걸 한입 드시고 토하셨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셨는데, 구할 길 없는 피자를 대신해 일종의 '가정식 피자'인 '라면 파이'를 만들어주시곤 했습니다. 계란에 양파나 당근을 다져 넣고 두툼하게 부쳐요. 그 다음 라면을 면만 삶아서 위에 올립니다. 라면이 식기 전에 치즈를 덮고 케첩을 뿌리면 스멀스멀 녹으면서 말로만 듣던 피자와 비슷한 모양이 돼요. 적어도 제 눈엔 그랬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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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무슨 '비법'이라도 전수하시듯 '라면 파이'를 직접 만들어보라 하시더군요. 그 다음부터 '라면 파이' 요리는 아버지가 아닌 제 몫이 됐죠. 전 지금도 이거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어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으면 손주들에게 직접 해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죠. 몸에 좋지도 않은 라면을 애들한테 먹이면 어떻게 하냐고 아내는 가끔 핀잔이지만 저는 계란에다 피망이나 당근같이 아이들이 먹기 싫은 걸 살짝 넣으면 되니깐 오히려 건강식이라고 우기지요. 제 입에는 여느 고급 피자보다 이게 진짜 맛있거든요. 제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저도 '비법'을 전수할 생각이에요. 아들은 또 손주에게 이 '라면 파이'를 먹이겠죠.
지금 말로는 '양푼이 비빔밥', 그때 말로는 그냥 '비빔밥'도 잊을 수 없어요. 중·고등학생 시절 명절이나 가족 생일처럼 잡채를 한 다음날 꼭 친구들을 불러다 양은 냄비에다 마구 섞어 먹었거든요. 당근 시금치 고기 버섯… 남은 거 다 넣고 고추장이랑 참기름 섞으면 바로 비빔밥이죠. 발 냄새 풀풀 풍기던 녀석들과 와구와구 비빔밥을 퍼먹으면 '앞 접시' 같이 '깔끔 떠는' 소품 따윈 생각조차 나지 않죠.
요즘도 밤 늦게 방송 끝내고 와서 마음이 헛헛해지면 양은 냄비 꺼내다가 남는 반찬 다 넣고 텅텅 소리 내면서 비벼 먹어요. 양은 비빔밥은 너무 뜨거우면 맛이 없어요. 밥이 너무 차도 잘 안 섞이니까 미지근한 게 좋구요, 거기에 냉장고에 묵어서 싸늘해진 반찬들을 넣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요. 차고 뜨거운 느낌이 입 안에서 마구 섞이면 그 시절 생각이 나면서 사라져요. 그 시절 그녀석들도 양은 냄비에 밥 비벼먹으며 제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