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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상처로 민주주의가 죽었다"…사법 장악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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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현 기자I 2025.12.12 06:15:00

[특별인터뷰]라울 산채스 우리바리 호주 라트로브대 교수
베네수엘라 사법 장악 25년 연구자의 경고
"개혁 명분, 실제론 법원 구성 재편…민주주의 붕괴"
충성파 판사 임명 반복에 전문성↓…법원 기능 마비

[이데일리 성가현 성주원 기자] “민주주의 붕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작은 개입과 조치가 반복·축적되면서 사법부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저는 이를 ‘천 개의 상처로 인한 사망’(death by a thousand cuts)이라고 부릅니다.”

라울 산체스 우리바리(Raul Sanchez-Urribarri) 호주 라 트로브대 법학 교수는 최근 이데일리와의 화상·서면 인터뷰에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붕괴 과정을 이같이 설명했다. 베네수엘라 대법원에서 5년간 변호사로 일하며 사법부 정치화를 목격한 그는 이후 20년 넘게 베네수엘라 사법부와 사법체계를 연구해왔다.

라울 산체스 우리바리 호주 라 트로브 대학 법학 교수. (사진=본인 제공)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법왜곡죄 신설,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대법관 증원, 법원행정처 폐지 등 대규모 사법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의힘 등 야권과 시민단체에서 비판을 제기하면서 논란이다. 특히 일각에서는 14년간 장기 집권하며 삼권분립을 무너뜨린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법 장악과 닮았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산체스 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대한민국과 베네수엘라 사법개혁을 단순하게 비교하면 안된다고 전제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사법개혁 사례와 그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한국과 베네수엘라 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를 비교하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맥락이 핵심’이라는 점”이라며 “비슷한 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결국 각 나라가 가진 고유한 맥락과 베네수엘라 사례의 특수성이 중요하다”고 전제했다.

“겉으론 개혁, 실제론 충성파 심기…몇 년마다 반복”

그가 가장 먼저 꼽은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해체의 시작점은 ‘사법부 개입’이었다. 1998년 ‘개혁’을 내세워 당선된 차베스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대법원을 중심으로 사법 시스템을 여러 차례 손봤다. 산체스 교수는 “겉으로는 새로운 법률 제정이나 사법개혁을 명분으로 삼았다”면서도 “실제 목표는 법원 구성을 재편해 차베스 진영의 정치적 가치·동맹·네트워크를 반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9년부터 새로운 판사나 대법관을 대거 임명하는 패턴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베스 정당 혹은 차베스 개인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이 점점 더 많이 판사로 임명됐다. 산체스 교수는 “정권은 자기들과 연결되어 있고 정권 존속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며 “부패한 체제라면 경제적·직업적 혜택까지 얻는 사람들을 법관으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판사, 전문성 떨어지고 충성심이 좌우…“정치세력 보호가 목표 돼”

더 심각한 문제는 임명되는 판사들의 전문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떨어졌다는 점이다.

산체스 교수는 “1999년 차베스가 처음 임명한 대법관들 중 상당수는 경력도 좋고 명성도 좋은 법조인들이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전문적 자격이 부족한 사람들, 정치적 연줄만 강한 사람들, 군부와 연결된 인물들, 심지어 전문적 역량이 거의 없는 사람들까지 임명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판사 스스로가 ‘판사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대 자체가 변질 됐다고 산체스 교수는 비판했다.

그는 “20년 경력의 훌륭한 판사이자 로스쿨 교수라면 정치인이 임명하더라도 학자로서의 명예, 동료 법조인의 존경을 유지하고 싶은 동기가 있다”며 “하지만 그런 고려가 전혀 없이 오직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판사는 ‘나는 법을 수호하라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정치세력을 보호하라고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태도는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판결을 낳았다. 베네수엘라 대법원 헌법재판부가 처리한 사건은 정권 초기 연간 3000~5000건에서 최근 150~200건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법원의 신뢰와 기능이 급격히 약화한 결과다.

라울 산체스 우리바리 라 트로브 대학 법학 교수가 최근 이데일리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베네수엘라 사법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화면 캡처)
“기존 민주주의의 약점을 개혁 명분으로 이용”

산체스 교수는 차베스 정권 이전의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도 이미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차베스가 사용한 전략은 민주주의가 이미 갖고 있던 문제들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며 “차베스 정권 이전에도 사법부는 정당과 얽혀 있었고, 부패가 존재했다”며 “차베스는 이를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약점을 확대·심화시켜 민주주의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베네수엘라 사법부가 원래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적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약점·취약성을 가진 상태였다고 분석해다. 그 결과 사법시스템이 차베스에게 유리하게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산체스 교수는 “저는 ‘그때 우리가 이걸 막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을까?’라고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며 “베네수엘라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 중 하나였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25년 만에 권위주의 체제로…800만명 조국 떠나

차베스에 이어 2013년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아래서 베네수엘라는 완전한 권위주의 체제로 굳어졌다. 야당은 정권 교체의 기회를 차단당했고 일부 야당 지도자들은 기소·탄압했다. 경제난과 맞물려 대규모 이민 사태도 발생했다. 지난 10년 동안 베네수엘라 3000만 인구 중 800만명이 조국을 떠났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5000만 인구 중 1500만명이 사라진 것과 같은 규모다.

산체스 교수는 2023년 고향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했다. 그는 “도시는 텅 비어 있었고 거리도 한산했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으며 집들은 폐허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며 “서서히 진행된 비극이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베네수엘라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개혁은 투명·전문·중립·독립 보존해야”

그렇다면 어떤 사법개혁이 바람직한가. 산체스 교수는 사법개혁을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가치로 ‘투명성, 전문성, 중립성, 사법 독립’을 꼽았다. 사법개혁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폭넓게 참여해야 하며, 특히 대학이나 시민사회단체처럼 공신력 있는 기관들의 의견은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만약 개혁 과정이 무질서하고, 부패에 취약하며, 독립적인 사법부를 만들기 위한 기준이 부실하다면 애초에 의도가 좋더라도 성공할 수 없다”며 “개혁의 목표는 효율적이고, 투명하며, 신뢰할 수 있고, 독립적인 사법부 가치를 실현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울 산체스 우리바리(Raul Sanchez-Urribarri) 교수는 누구?

차베스 정권의 사법 장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산증인이다. 산체스 교수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법학석사(LLM) 학위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99년 차베스 집권기와 맞물려 대법원에서 약 5년간 변호사로 일하며 사법부가 정치화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급격하게 부패하는 사법부를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학계로 방향을 틀었고, 이후 20년 넘게 베네수엘라 사법부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헌정주의, 사법정치, 법치주의를 비교 관점에서 다루며, 특히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는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쇠퇴 과정을 장기간 추적·분석하며, 변화하는 정치·사회 환경 속에서 법 제도가 수행해 온 역할을 규명해 왔다. 공저 편집서로는 ‘Judicial Activism in Comparative Perspective(비교 관점에서 본 사법적 적극주의)’(피터 랑, 2024), ‘Informality and Courts(비공식성과 법원)’(에든버러대 출판부, 2024), ‘Authoritarian Consolidation in Times of Crisis(위기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 공고화)’(라우틀리지, 2025)가 있다. 현재 그는 호주 멜버른의 라 트로브 대학교(La Trobe University)에서 범죄·사법·법학을 가르치고 있다.

라울 산체스 우리바리 교수가 존 폴가-헤치모비치 미국 해군사관학교(United States Naval Academy) 정치학과 부교수와 함께 연구·저술해 지난 3월 출간한 ‘Authoritarian Consolidation in Times of Crisis(위기 시기의 권위주의 체제 공고화)’ 표지. (사진=라우틀리지 Routledge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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