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록이 이처럼 대중의 주목을 받는 동안 헤비메탈은 위기를 맞았다. 블랙 사바스는 보컬리스트 오지 오스본을 해고했고, 레드 제플린은 멤버 간 불화로 인해 활동이 현저하게 줄었다. 딥 퍼플은 해체됐다. 헤비메탈을 창시한 3대 밴드가 모두 이런 처지에 놓이자 미국 음악지 크림은 1979년 10월호에 ‘헤비메탈은 죽었는가?(Is Heavy Metal Dead?)’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헤비메탈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당시의 암울한 경제 상황이었다.
영국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경기침체로 인해 완전고용이 붕괴되고 실업률은 1976년 5%를 넘어섰다. 여기에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1983년 2월에는 실업자가 사상최고인 322만4715명에 달했다. 거리로 내몰린 공장 노동자들은 파업과 폭동을 일삼았고, 이들은 종종 헤비메탈 음악을 통해 분노를 표출했다.
음악 저널리스트인 존 터커는 “1970년대 후반부터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탄생한 밴드들과 새로운 음악 스타일은 경제 불황의 산물”이라며 “공장 노동자나 상점 점원 등 일자리를 빼앗긴 젊은이들은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돈을 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고 설명했다.
실직 노동자들 일부는 직접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했다. 데프 레퍼드의 보컬리스트 조 엘리엇은 공장 사무실에서 일하다 해고당하자 퇴직금 500파운드를 사용해 프로모션 앨범을 만들었다. 색슨의 보컬리스트인 비프 바이포드는 목수, 광부, 공장 노동자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 밴드를 결성했다.
밴드 활동에 직접 뛰어들지 않은 젊은이들도 헤비메탈 음악에 빠져들었다. 헤비메탈은 이들에게 재미를 줬고, 스트레스를 풀어줬으며, 실업으로 인해 모든 것을 빼앗긴 동료들 간의 동질감을 부여했다. 헤비메탈 밴드들은 주로 술을 파는 펍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음악을 듣는 데는 돈도 별로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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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의 빈 자리는 다른 밴드들에게 기회가 됐다. 데프 레퍼드, 색슨,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UFO, 베놈 등이 잇따라 데뷔했다. 블랙 사바스는 새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를 영입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영국 음악지 사운즈의 기자 제프 바튼은 1979년 5월호에서 이같은 움직임을 ‘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메탈(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NWOBHM)’이라고 명명했다. 바튼은 2014년 4월 패션 잡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엔 수백개, 어쩌면 수천개의 밴드들이 활동했다. 사운즈 사무실에 새로운 NWOBHM 싱글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날은 드물었다”고 회고했다.
1979년부터 메이저 음반 레이블도 헤비메탈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색슨이 까레르와 계약한 것을 필두로 데프 레퍼드는 포노그램과, 아이언 메이든은 EMI와 각각 계약을 체결하고 국제 무대로 진출할 채비를 갖췄다. 헤비메탈 전문 잡지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운즈의 편집인이 투자하고 바튼이 기획한 커랭이 1981년 6월 창간호를 내놓았고, 미국에선 써커스와 히트 퍼레이더가 창간됐다. 독일에선 메탈 해머가 등장했다.
대형 음반사와 헤비메탈 전문지의 도움으로 NWOBHM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 밖에서도 헤비메탈 밴드들이 속출했다. 미국에서는 블루 오이스터 컬트와 테드 누전트가 등장했고, 독일의 스콜피온즈와 호주의 AC/DC가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1980년대를 풍미한 헤비메탈의 시대는 이렇게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