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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적으며 곱씹는 글맛…필사에 빠졌습니다

김미경 기자I 2025.02.05 07:47:51

2030 텍스트힙 열풍, 읽기서 쓰기로
"주옥 같은 구절 찾아 다시 따라 적어
내용 각인되고 오래 기억에 남아"
`읽는 재미` 넘어 `쓰는 즐거움` 추구
시·산문서 철학·헌법으로 확장
출판계 필사책 봇물 `다양성 훼손` 우려도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또박또박 글을 따라 적으며 곱씹는 맛이 있죠.”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전업주부 김신영(34) 씨는 요즘 필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올초 새해 선물로 받은 필사 책 덕분에 글 쓰는 취미가 생겼다는 그는 “잡생각 없이 온전히 글에만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말했다.

이미란(47) 롯데문화재단 마케팅팀 수석은 무려 8년째 필사를 즐기는 덕후(마니아)다. 최근엔 설연휴에 몰아본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주옥같은 구절들을 찾아 옮겨 적었다. 이 수석은 “손으로 밀고 나가는 속도에 맞춰서 내용이 천천히 각인되고, 다 쓰고 난 뒤 정갈하게 쓰여진 문구를 보면 잔상이 오래 남는다”며 “좋은 구절을 나중에 쉽게 찾아볼 수도 있어 필사를 즐긴다”고 설명했다.
이미란 롯데문화재단 마케팅팀 수석이 요즘 곱씹고 있는 구절을 필사한 모습 (사진=이미란씨 제공).
문해력부터 부자로 만드는 필사책까지

‘읽는 것’을 넘어 ‘쓰는’ 필사(筆寫)가 유행이다. 2030 세대 중심으로 유행한 ‘텍스트 힙‘(Text hip·독서하는 것이 멋지다) 열풍이 최근엔 필사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독서를 통한 즐거움에서 직접 손으로 글을 쓰는 행위로 나아간 것이다.

출판계도 필사 열풍에 올라탔다. 지난달 이후 대형 서점에 등장한 필사 관련 책만 무려 40종이 넘는다. 불경, 성경 등을 베껴 쓰는 차원을 넘어 필사책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시와 산문을 위주의 정형화한 필사책이 많았다면 최근 들어선 니체, 쇼펜하우어 등 유명 철학자들의 문장부터 헌법, 노래 가사 등으로 확장하는 분위기다. 4인조 밴드 ‘데이식스’(DAY6)의 노랫말을 모은 ‘DAY6 가사 필사집’(삼호ETM)의 경우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사회·경제 분야 책들도 필사 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불티나게 팔린 책 ‘헌법 필사’(더휴먼)가 대표적이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로 인해 헌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책 품귀 현상도 나타났다”면서 “헌법을 직접 쓰면서 되새길 수 있는 필사 도서에 젊은 독자층의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연봉을 2배로 만드는 초필사력’(라온북)이나 문해력, 어휘력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필사 책은 직장인에게 인기다.

기존에 펴낸 문학 작품을 활용한 필사집도 나왔다. 최근 출간한 ‘시로 채우는 내 마음 필사노트’(창비)는 100개의 시구를 그리움, 사랑, 휴식, 위로 등 감정별로 분류해 10부로 구성했다. 책에 수록된 구절들은 ‘창비시선’ 500번째 책 출간을 맞아 시인들이 엄선했다. 신경림,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이병률, 황인찬 등 시인 60명의 시가 실렸다. 필사집 성격상 적당한 분량을 유지하기 위해 시 전체 또는 일부 시구가 수록됐다.

출판계 관계자는 “필사 열풍은 ‘텍스트힙’ 유행과 유사한 맥락”이라며 “손글씨를 쓰는 것 자체가 독서보다 희귀한 일이 되면서 필사를 인증하는 게 유행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자칫 이러한 흐름이 출판 시장의 다양성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관계자는 “출판사들이 출판시장 불황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단 열풍이 불면 비슷한 유형의 책을 쏟아내는 것을 이해한다”면서도 “하지만 출판사들의 기획력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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