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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다.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문재인 대통령 7월 1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 中)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늘 당당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 무력감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7월 11일 미국과 독일 등 열흘에 이르는 해외순방 강행군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국무회의 석상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의 절박성에도 우리에게는 해결할 힘이 있지 않다고 자조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우리가 북핵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질 수 없다는 고백이자 북미 사이에서 딜레마를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뉴스에 묻히기는 했지만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북핵문제’가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얽힌 국제적 이슈인지를 상징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여전히 80%에 육박하는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가는데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구요. 물론 내치는 안정적입니다. 나라밖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위기의 징후는 한둘이 아닙니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반도를 휘감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점은 대한민국이 이를 주도적으로 컨트롤해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난제라는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대략난감’입니다. 안보와 평화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이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한민국은 무시하고 모든 것을 미국과 담판짓겠다’는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은 여전합니다. 대북압박 기조를 강화해온 미국 역시 최악의 경우 ‘선제타격’이라는 군사적 옵션을 꺼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북한과 미국은 최근 전쟁불사의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베를린구상을 외쳤지만 사실 빛이 바랬습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불면의 밤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미 전쟁불사 초강경 대치…전략적 말폭탄 vs 전쟁 구렁텅이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북한문제와 관련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왔습니다. 새 정부 출범 나흘만인 지난 5월 14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렸을 때만 해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새 정부 떠보기 차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후 에도 도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강력 규탄하면서 단호한 대응과 더불어 남북대화의 끈은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보수정권의 대북강경 기조가 북핵문제 해결에 실패한 만큼 대화와 제재 병행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강조했습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독일에서 열린 G20정상회의에서도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문 대통령의 대북전략과 구상을 집대성한 게 바로 베를린 구상입니다.
그러나 여름휴가 직전인 지난 7월 28일 심야 북한이 ICBM급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는 관측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특히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는 관측 속에서 만약 대기권 재진입체 기술까지 확보한다면 미국의 패권전략과 동북아시아의 역학구도는 급변합니다. 북한이 핵탄두 ICBM을 실전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북한이 워싱턴, 뉴욕, LA 등 미국 동서부 해안을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본토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 없는 미국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전쟁, 불바다, 화염과 분노, 예방전쟁, 괌 타격 등등. ‘말폭탄’이라는 평가절하도 있지만 북미간 최근 설전은 점입가경입니다. 전쟁일보 직전의 상황입니다. 물론 향후 전개될 대화국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고도로 계산된 전략적 발언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에이, 설마 전쟁까지야”라는 반응도 나옵니다. 다만 트럼프와 김정은의 경우 합리적 전망이 불가능한 예측불허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설마가 사람 잡을 수 있다”는 비관론도 적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한반도가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의지와 관계없이 북미 어느 쪽이든 방아쇠를 당기면 전쟁은 시작됩니다. 주무대는 한반도입니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북한의 괌 주변 폭격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보복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의 북한 핵시설 선제타격 역시 북한의 남한과 일본에 대한 보복폭격으로 이어집니다. 중국이 참전할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전쟁의 승자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수많은 사상자는 물론 서울과 평양은 사실상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남북한은 21세기가 아닌 석기시대 수준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북미 제네바합의와 9.19 공동성명…1.2차 북핵위기는 어떻게 일단락됐나?
한국전쟁 이후 정전 상태의 남북한이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내몰린 것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게 1·2차 북핵위기입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미는 당시 무력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북한의 비밀 핵개발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명백한 위반이었습니다. 남북회담에서 불바다 발언이 나왔고 미국의 영변폭격 가능성으로 최악의 위기상황까지 치달았습니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로 일단락됐습니다. 2차 북핵위기는 2002년 10월 미국 협상단의 평양 방문 때 북한의 핵개발 시인으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이후 중국의 제안으로 6자회담(남북한 및 미중일러)이 열렸고 2005년 이른바 ‘9·19 공동성명’ 이 채택되면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다만 북한이 다음해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실시하면서 또다시 위기 국면으로 접어든 뒤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중대한 군사적 도발이라면서 9.19 공동성명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한미는 북한에 공격에 대비한 방어훈련이라고 반박해왔습니다. 또 ‘행동 대 행동’이라는 합의에도 북한의 비핵화는 지켜지지 않았고 북미관계 정상화도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북핵 또는 북 미사일 위기는 지루한 레퍼토리를 반복합니다. 北도발 사전징후 포착 → 국제사회 경고 → 北도발 감행 → 국제사회 강력 규탄과 유엔 안보리 제재 강화의 수순입니다. 아울러 중국과 러시아 특히 중국이 대북제재에 소극적이라는 미국의 불만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합니다.
이러한 무한반복의 악순환은 왜 해결되지 못했을까요? 본질은 간단합니다. 핵포기는 없다면서 북미수교와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북한과 비핵화를 전제로 북미관계 정상화를 논의할 수 있다는 미국의 입장이 180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공동성명이 파기되면서 양측의 신뢰는 바닥이 난 상황입니다. 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 여전히 재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전략을 실패했습니다. 임기 동안 북핵문제에 대한 공개적 언급 없이 소극적 압박 속에서 북한의 변화를 기다렸지만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북한은 그 기간 동안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더 큰 위협이 됐습니다.
현 단계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 배치하고 미국이 선제타격이라는 군사적 옵션을 꺼내드는 경우입니다. 반대로 전면적 대결을 피한다면 과거 해법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1·2차 북핵위기 타결 당시 북미 합의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우선 94년 북미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NPT 잔류와 핵개발 포기 △북미수교 △북한 측에 에너지 공급이 주 내용입니다. 9.19 공동성명도 유사합니다. 북한의 핵무기 파기와 NPT 복귀, 한반도 비핵화 이행, 미국의 북한 불가침 확인,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북한에 에너지원 공급 등입니다. 타결 주체가 북미에서 남북한 미중일러 6자회담 참가국으로 확대됐을 뿐입니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 vs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는 크게 보면 두 가지 흐름입니다. “전쟁 중에도 적과의 대화는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단체제의 항구성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통일을 지향하는 게 타당합니다. 반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역설적으로 안보를 보다 튼튼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대화와 안보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 행보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그건 대한민국 대통령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입니다.
문제는 주요 정파와 보수·진보진영의 강경파들이 외눈박이의 시선으로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북한은 통일의 파트너입니다. 통일이 성사되면 장기적으로 1억 경제권의 한반도가 탄생합니다. 분단체제에 따른 과도한 국방비는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이나 복지비용으로 더 많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변 열강들도 더 이상 통일한국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 북한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현존하는 위험입니다. 대남 적화통일의 기조 아래 툭하면 크고작은 도발을 일삼아왔기 때문에 통일의 당위보다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레임 체인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때문에 외교안보 사안은 늘 초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당위에도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우선 대화론자들은 안보론자들에게 ‘전쟁광’이라고 꼬리표를 붙입니다. “전쟁은 민족의 공멸”이라면서 안보강화론마저도 딴지를 겁니다. 김정은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남북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안보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론자의 전략은 북한의 위장평화 전략에 놀아나는 순진무구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종북좌파’라는 낙인도 이어집니다. 김정은은 미치광이 수준의 독재자이기 때문에 대화보다는 제거가 합리적이라는 판단합니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책무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장, 그리고 평화적 통일 추구가 명시돼 있습니다. 때로는 대화 중시 전략으로, 때로는 안보 강화 전략으로 남북관계를 컨트롤하는 게 당연합니다. 문 대통령은 어찌보면 대화론자이면서도 안보론자입니다.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한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나부터 총들고 나서겠다”고 강경한 의지를 보여준 적도 있습니다.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통미봉남 전략으로 대화 가능성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화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과거 남북은 대립과 갈등의 역사 속에서도 대화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성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7.4 남북공동성명, 전두환 정권 남북 이산가족 상봉, 노태우 정권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김일성 남북정상회담 합의, 국민의정부 시절 6.15공동선언, 참여정부 시절 10.4정상선언 등이 대표적입니다. 모두 대화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성과들입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어렵지만 갈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싹트는 대화의 기운…“위기는 곧 기회다”
다행스러운 것은 북미가 전쟁불사를 외치는 가운데서도 흘러나온 대화 분위기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초강경 발언을 쏟아냈을 때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은 북한의 정권 교체를 추구하지 않으며 북한의 정권 붕괴를 추구하지 않는다”며 대화 의지를 내비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면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북한과의 협상은 항상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도 최근 캐나다 국적의 한국계 임현수 목사를 석방하면서 대화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전화통화도 의미심장합니다. 국면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분수령입니다. 중국은 그동안 북미대치와 관련해 ‘쌍중단(雙中斷)’과 ‘쌍궤병행(雙軌竝行)’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쌍중단은 북한이 핵과 ICBM 도발을 중지하고 한미 역시 연합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입니다. 쌍궤병행 역시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평화체제 구축을 동시에 이행하자는 것입니다. 1·2차 북핵위기 해법과 유사한 대목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국제사회가 핵포기를 요구하는 논리적 모순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미 입장에서는 북한이 핵폐기 없이 방어훈련을 전쟁책동이라며 무조건적 중단을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북미의 전쟁 말폭탄이 현실이 되면 한반도는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휩쓸립니다. 남북한이 6.25전쟁 이후 이룬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될 수 있습니다. 전쟁보다는 차라리 항구적 위기상황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물론 최선은 대화를 통한 북핵문제의 해결입니다. 대한민국은 안보불안에서 벗어나고 지긋지긋한 코리아 리스크를 덜어낼 수 있습니다. 북한 역시 북미수교를 통해 체제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등 미국 어느 역대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한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최고의 치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북핵 문제가 풀리고 북미수교와 평화협정 체제가 이룩된다면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 아베, 푸틴 등 남북한과 미중일러 6개국 정상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는 역사적인 장면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 단계에서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은 물론 미중일러 한반도 주변 4강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해법은 사실 이것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