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의 후원을 받아 지리산 둘레 300㎞를 잇는 지리산 도보 트레킹 코스 만들었다. '지리산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길은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3개도, 5개시 100여 개 마을을 이어 걷도록 한 장거리 도보 코스다. 길 전체는 2011년 완성될 예정이며, 현재 탐방 가능한 구간은 전체 300㎞ 중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까지 이어지는 22㎞의 '시범 구간'이다.
신록이 가장 예쁜 색을 띈다는 5월 초, 천천히 걸으면 1박 2일 정도 걸리는 '지리산길'의 시범구간을 느릿느릿 둘러보고 왔다. 이 구간은 다시 매동마을~금계마을(12㎞)의 1구간과 금계마을~세동마을(10㎞)의 2구간으로 나눠진다. 2구간 중간쯤 있는 벽송사를 지난 지점부터는 아직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안내자가 없다면 매동마을에서 벽송사까지만 가는 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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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매동마을~창원마을
'22㎞면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로 달릴 경우 1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가뿐한 거리지.' 쓸데없는 계산을 뚝딱 해치우고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점인 매동 마을회관 앞에 오후 2시쯤 섰다.
매동(梅洞)이란 이름은 마을의 생긴 모양이 매화를 닮아 붙여졌다. '지리산길'의 코스를 뜻하는 솔방울 무늬를 따라 작은 고을을 둘러싼 소나무 숲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파란 하늘을 나무들이 가리고 서면서 시원한 그늘이 이어졌다. 숲길 군데군데 부부가 누운 듯한 나란하고 단정한 무덤이 쌍으로 나타났다 물러섰다. 할 줄만 안다면 휘파람을 불고만 싶은, 5월의 신록을 얇게 바른 부드러운 산길이다.
15분쯤 걸었을까. 300살은 족히 먹었다는 매동마을의 자랑 개서어나무가 껄껄 웃는 맘씨 좋은 할머니처럼 숲 속 깊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육나무'라는 별명에 걸맞게 울퉁불퉁한 가지와 줄기를 뻗어대고 있지만 올해 새로 돋은 잎사귀만큼은 아기 살결같이 보드라운 연초록을 하늘하늘 흔들어댔다.
'껙껙껙껙' '뽀로로로로로' '쪼쪼쪼'…. 연분홍 진달래꽃 사이로 새들이 온갖 기이한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출발 전 지리산길 안내소에서 얻은 '지리산길 동식물 이야기' 팸플릿엔 지리산의 새들을 지저귀는 소리로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쓰여 있다. '쯔-비 쯔-비, 쯔쯔비-쯔쯔비-' 하면 박새, '힛, 힛, 힛, 삐쭈삐찌이히찌' 하면 딱새, '히요, 호호, 호이호' 하면 꾀꼬리…이런 식이다. 글로만 봤을 땐 '이걸로 어떻게 찾나'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산에서 녀석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궁금한 마음에 자꾸 팸플릿을 펼쳐보게 됐다.
매동마을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상황마을의 다랑이논이 위로 층층, 아래로 층층이다. 그 사이로 난 가느다란 길을 뒤뚱뒤뚱 걷다 만난 50대 아주머니가 나물을 뜯다 말을 건네왔다. 5월 초 막 물을 대기 시작한 다랑이논은 여행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지런한 황금 물결이 아닌, 다소 거친 흙덩이의 모양을 띄고 있었다. '농부가 집에 가려는데 (다랑이)논이 하나 없어져 살펴봤더니 삿갓 밑에 논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는 작은 땅도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지어온 산사람들의 바지런함을 그려낸다.
마을마다 작은 길이 많이 나있지만 솔방울 모양으로 된 표지가 갈림길마다 설치돼 있어 길 찾기는 수월하다. 길보단 뻐근해오는 근육들이 더 문제다. 전북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 사이를 잇는 등구(登龜)재를 넘을 때쯤이면 숨이 상당히 가빠지게 된다. 전라도·경상도 사람들이 나무 하고 장에 가느라 하도 넘어다녀서 길이 자연스럽게 생겼다는데 꼭대기 높이가 청계산(해발 618m)보다 높은 해발 700m에 달해 뚝딱 넘기는 쉽지 않다.
고개를 지나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낸 창원마을엔 그 흔한 매점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산에는 잘 정비된 약수터가, 산 아래엔 음식점과 구멍가게가 꽉 차 있는 도시의 등산로를 생각하고 물 한 병 안 사간 게 크게 후회됐다. "해 넘어가는 데 오데 가요"라고 말을 거는 아주머니에게 물 한 잔을 얻어 먹고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마을에서 나가려면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마천 콜택시 (055)962-5110, 창원마을에서 출발지인 매동마을까지 돌아가려면 1만1000원 정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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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창원마을~백송사
마을 사람들이 창원마을 떠나기 전 '윗당산'에 꼭 들렀다 가라고 권했다. '마을의 수호신 나무'라는 뜻의 당산나무는 새 길이 나면서 많이 사라졌다는데, 창원 마을엔 커다란 당산나무가 다섯 그루나 있으니 얼마나 뿌듯할까. 이 중에서 가장 크고 늠름한 600년 된 느티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윗당산'이라고 부르는데 나무 앞에 서면 고요한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길의 성격과 분위기를 첫날 대충 익혀서 출발하는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넘어가는 출발점은 바닥이 솔방울 천지인 소나무 숲이다. 송진 향기가 빼곡하다. 금계마을부터 둘째 날의 목적지인 벽송사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두시간 정도는 등산한다고 생각하고 인내심 있게 산을 올라야 한다.
너무 지쳐 다리가 흐늘흐늘해질 때쯤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 숲이 나타난다. '시누대는 키가 작지만 빽빽하게 자라 동물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다. 낮에는 동물이 몸을 숨긴 채 있다가 밤이 되면 활동한다.' 시누대 숲에 대한 안내 표지판을 읽으며 숨을 한 차례 고른 다음 오르막을 꾸역꾸역 더 걸었다. 첫날 코스처럼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은 것이 아쉬워진다. 절은 산 위에 있으니 오르막을 따라 걷다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오면 이를 따라 가면 된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절 바로 옆에 세워진 안내판의 '이제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가는 빨치산 사건의 비극을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어쩐지 어색하다.
벽송사 바로 옆에 있는 서암정사는 바위 더미 위에, 바위의 모양새를 그대로 살려 만든 웅장한 사찰로 벽송사보다는 훨씬 크고 볼 거리가 많다. 사찰 입구에 붙어있는 '눈밭을 걸어가는 사람아, 발걸음을 함부로 옮기지 마라. 오늘 나의 행적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네'같은 '좋은 말씀'을 읽다 보니 길었던 오르막의 고달픈 기억이 잠시나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숲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시범구간'은 벽송사에서 8㎞가량 더 이어지지만, 일반인들은 이쯤에서 지리산 도보 순례를 마무리하는 게 좋다. 벽송사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빨치산길'의 등산로가 몇 해 전 산사태로 군데군데 끊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산길에 들어섰다가 조난되기 직전, 더듬더듬 나뭇가지를 부여 잡고 간신히 가던 길을 찾아 되돌아와야 했다. '이어지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길이야'라고 툴툴거리며 다시 벽송사로 돌아오는 길, '세상과 나의 대화는 산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이어진다'는 이성복 시인의 문구 하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는 길
자가용으로: 중부고속도로→함양 분기점→지리산 나들목→일성콘도 방향→매동마을
대중교통으로: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지리산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인월 터미널에서 내린다. 인월 터미널에서 매동마을 가는 버스는 오전 6시50분~오후 8시,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산행 안내
지리산길에는 매점이나 약수터, 화장실이 거의 없다. 물을 챙겨가야 한다. 매동 마을회관, 창원마을 마을회관, 벽송사, 서암정사 외에는 공중 화장실을 찾기 어렵다. 벽송사 지나 '빨치산 길'을 넘어 시범구간 끝까지 가보고 싶다면 '숲길'에 안내자 동행 신청을 미리 해야 한다. 매주 수·토요일 오전 10시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지리산길 안내 센터에서 출발하는 '길동무 프로그램'에 신청하면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동행자가 함께 걸어준다. 매회 선착순 20명.
◆숙소
숙박은 매동마을 민박(011-524-5325·방 하나 약 3만원)이나 금계마을 내 가온누리 펜션(016-9667-1726, www.지리산팬션.kr ·4인 가족 기준 주말 10만원, 평일 8만원)에서 가능하다.
◆여행 문의
지리산길 안내센터 (063)635-0850 www.trail.or.kr. 걷기전에 들리면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