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국회는 국정 현안 전반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한 기업인을 국감장에 부를 수 있다. 홈플러스 사태나 롯데카드 해킹사고처럼 국민적 관심이 큰 사안이 있다면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같은 인물의 출석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 기업인들까지 줄줄이 부르는 관행은 여전하다. 과거 국감 사례를 보면, 의원들이 마구잡이로 기업인을 불러 세운 뒤 발언 기회조차 주지 않고 호통만 치는 장면이 반복됐다. 정치적 이슈를 부각시키려는 ‘보여주기식 청문’이 본연의 감사 기능을 희석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번 국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야 의원들이 막말과 고성을 주고받는 동안, 기업인들은 들러리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국회의원이 기업인에게 호통을 치며 망신을 주는 건 잠깐이지만, 국감장에 나오기 위해 기업 내부가 준비하는 시간은 며칠, 길게는 몇 주에 걸친다. 그 기간 동안 기업의 핵심 경영진과 실무진은 생산 활동 대신 ‘국감 대응 태스크포스(TF)’에 묶인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필요한 ‘망신주기 국감’은 오히려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지금은 경제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기다. 한미 관세협상, 미중 무역전쟁, 고환율, 고금리, 지정학 리스크까지 겹쳐 기업들은 생존을 걸고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 모습은 국민에게도 실망감을 준다. ‘기업을 길들이는 정치’가 아니라 ‘기업과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가는 정치’가 필요한 때다.
다행히 일부 상임위에선 불필요한 증인 채택을 철회하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하청업체 경영 문제로 증인 명단에 올랐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국토교통위는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허윤홍 GS건설 대표·최주선 삼성SDI 대표 등을 명단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인들이 시급한 현안을 미뤄둔 채 국감장에 나와야 하는 형편이다. 오는 28일 정무위 종합감사에 증인으로 오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최 회장이 의장을 맡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이 개회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증인 철회 소식은 아직 없다.
애초 200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됐던 기업인 증인 수는 일부 줄었지만, 여전히 지난해(159명)를 웃돌아 역대 최다를 기록할 전망이다. ‘호통 정치’가 여전하다는 방증이다. 국감이 본래 취지대로 운영되려면 ‘호통과 망신’이 아니라 ‘대화와 점검’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문제를 찾고 해법을 제시하는 ‘생산적 감사’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국감은 매년 반복되는 정치 이벤트에 불과하다.
국회의원들은 기업인들에게 호통을 칠 게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경제 위기 속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 있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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