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점심시간 젊은 직장인들의 대화 주제는 단연 주식과 ETF, 그리고 퇴직연금입니다.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DC형(확정기여형) 가입자들의 가슴은 철렁합니다. 과거 DB형(확정급여형) 시절에는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내 퇴직금은 안전했고, 수익률 고민은 회사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무거운 짐이 오롯이 나의 어깨 위로 올라왔습니다.
누가, 왜, 기업이 지던 책임을 우리에게 넘긴 것일까요? 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에는 정책당국의 치밀한 조사와 계획이 아닌, 한 남자의 ‘우연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1978년의 발견, 1980년의 첫 실험
1970년대 후반, 미국 기업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스터드베이커 사건 이후 제정된 ERISA 때문에, DB 연금을 유지하는 비용과 규제가 너무 까다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1978년, 미국의 세법이 개정되었습니다. 당시 베네핏 컨설턴트였던 테드 베나(Ted Benna)는 법전을 뒤적거리다가 ‘401조 k항’이라는 작은 조항을 발견합니다. 법의 본래 취지는 보너스를 현금으로 바로 받으면 세금을 내지만, 적립해두면 세금을 나중에 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베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보너스에만 적용되던 세금 혜택 조항을 비틀어 본 것입니다. “이걸 응용해서 직원이 자기 월급을 떼어 적립하게 하면 어떨까? 여기에 회사가 돈을 좀 보태주는 ‘매칭’으로 유혹한다면? 직원은 세금 혜택을 받고, 회사가 보태주는 공짜 돈을 얻고, 회사는 골치 아픈 연금 운용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데?”
그는 1980년, 자신이 몸담고 있던 회사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 아이디어를 처음 실행에 옮겼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이것은 혁명이었습니다. 회사는 정해진 돈만 넣어주면 끝이고, 그걸 어디에 투자할지는 직원이 알아서 결정하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중에 수익률이 나빠져도 회사는 책임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 퇴직연금의 판도를 바꾼 401(k), 즉 DC(확정기여형) 제도의 탄생입니다. 정부가 치밀하게 설계한 제도가 아니라, 보너스 세법의 틈새를 월급으로 확장시킨 ‘우연’이 만든 괴물이었습니다.
여기서 ‘괴물’이라는 말은 DC 제도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대로 길들이면 개인에게 소유권과 이동성을 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동 원리를 모른 채 “선택권을 주었으니 좋은 제도”라고 믿는 순간, 이 제도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조용히 삼키는 장치가 됩니다.
제도의 본질 — 리스크의 대이동
401(k)의 확산은 단순한 연금 제도의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위험의 대이동’이었습니다. 과거 DB 시대에는 장수 리스크와 투자 리스크를 모두 기업이 졌습니다. 하지만 DC 시대가 되면서 이 두 가지 거대한 리스크가 근로자 개인에게 넘어왔습니다.
겉으로는 자유가 늘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 계좌가 생기고, 내가 상품을 고릅니다. 분명 중요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뒷면에는 훨씬 무거운 문장이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결과도 당신 책임입니다.”
이제 근로자는 스스로 최고재무책임자가 되어 주식과 채권의 비율을 정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야 합니다. 오래 살 위험도, 잘못 투자할 위험도, 너무 일찍 돈을 써버릴 위험도 모두 개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잘하면 자산을 키울 수 있지만, 못하면 노후 빈곤은 오직 당신의 책임이 됩니다. 이것이 DC라는 괴물의 본질입니다. 선택권을 주는 제도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이전하는 제도인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결정적 차이 — ‘무기’를 주었는가
하지만 지금 미국과 한국의 DC형 가입자의 운명은 서로 다릅니다. 미국의 401(k)도 처음부터 완성된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기업의 연금 책임을 개인 계좌로 옮긴 뒤, 한동안 근로자들은 우리와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상품 목록은 있었지만,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거나,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단기상품으로 도망쳤습니다.
미국이 뒤늦게 깨달은 것은 단순했습니다. “개인에게 리스크를 넘겼다면, 그 리스크를 다룰 수 있는 ‘무기’도 쥐여줘야 한다.” 그래서 2006년 연금보호법(PPA)은 DC 제도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개인이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을 제도 안에서 처리하는 방향으로 고쳤습니다.
핵심은 적격 자동 투자 상품(Qualified Default Investment Alternative, QDIA)이었습니다. 근로자가 아무런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기업이 미리 정해 둔 적격 투자상품으로 돈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적격 상품의 중심에 타겟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 TDF) 같은 생애주기형 상품이 놓였습니다. 가입자가 스스로 주식과 채권 비율을 조정하지 못해도, 은퇴 시점에 맞춰 포트폴리오가 자동으로 조정되게 한 것입니다.
이때 기업에게는 역할과 보상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기업은 아무 상품이나 던져주는 존재가 아니라, 상품을 선별하고 감시하는 수탁자이자 게이트키퍼가 되었습니다. 대신 절차를 제대로 지키고 적격 상품을 신중하게 선정·관리했다면, 그 투자 결과가 나쁘더라도 일정한 면책권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미국은 DC를 없앤 것이 아니라, DC가 개인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기업의 스크리닝 책임과 면책권을 함께 설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미국 401(k)를 보고 “미국은 기업에게 수탁자 책임을 부여한다, 그러니 한국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개인 선택의 혼란을 겪은 뒤 2006년에 제도를 고쳤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놓친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2006년 이후 진화를 충분히 보지 못한 채, 그 이전의 DC 껍데기에 가까운 구조를 가져왔습니다.
한국의 현실 — 맨몸으로 전쟁터에 내몰다
그 결과 한국 기업은 임금의 8.3% 남짓한 법정 부담금만 납입하면 운용 책임에서 거의 자유로워지고, 가입자는 수백 개 상품 목록 앞에 혼자 남습니다. 미국이 뒤늦게 장착한 진짜 디폴트 옵션, 적격 자동 투자 상품(QDIA), 수탁자 게이트키퍼 같은 핵심 무기는 충분히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DC를 마치 더 선진적이고 더 좋은 제도인 것처럼 말하는 분위기는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러나 DC는 그 자체로 좋은 제도가 아닙니다. 좋은 DC와 나쁜 DC가 있을 뿐입니다. 좋은 DC는 개인의 이름으로 자산을 쌓아주되,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과 위험은 시스템이 덜어줍니다. 나쁜 DC는 개인에게 수백 개의 펀드 목록을 던져주고 “알아서 고르세요, 책임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많은 근로자가 마주한 것은 안타깝게도 후자에 가깝습니다. 금융 지식이 부족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자유’가 아니라 ‘답답함’입니다. 그래서 앞서 확인했듯, 한국 근로자들은 DC 계좌의 80%가 넘는 돈을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어두고 있습니다. 물가상승률도 못 따라가는 수익률로, 소중한 노후 자산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개인을 구해야 한다
DC 제도의 확산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많은 근로자의 퇴직연금은 DC 계좌 안에 있고, 앞으로도 그 비중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곧바로 “좋은 제도”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핵심 질문을 놓칩니다. 좋은 DC란 개인에게 책임만 떠넘기는 제도가 아니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선택과 위험을 시스템이 대신 덜어주는 제도입니다.
지금 한국형 DC는 근로자에게 “수영하는 법도, 구명조끼도 주지 않고 바다 한가운데 던져놓은 격”입니다. 개인에게 “금융 공부를 하라”고 다그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미국처럼 개인이 투자를 몰라도, 바빠서 신경을 못 써도, 시스템이 알아서 노후 자금을 불려주는 진짜 무기가 필요합니다.
한국도 뒤늦게 ‘디폴트옵션’을 도입했지만, 그마저도 원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자동항법 장치가 한국에서는 왜 ‘가짜’로 변질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된 무기를 손에 쥘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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