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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걷되 침범하지 않은…같았으나 달랐던 부부의 세계 [국현열화]<6>

오현주 기자I 2025.04.18 07:40:00

△한국화 지평 넓힌 부부 화가 ''김기창·박래현''
''현대적인 한국화'' 공동 목표 아래
입체주의 추상, 실험적 선·면 시도
세부적인 방법은 독립적으로 개척
내조·외조 넘나들며 서로 작품 존중
이례적 부부 화가로 미술사에 남아

김기창의 ‘흥락도’(1957). 한국적 소재에 서구의 입체주의를 입혀 완성한 대형 반추상화다. 상모를 쓰고 저고리·바지를 걷어붙인 풍물패가 벌이는 놀이에서 역동성이 묻어나온다. 지금이야 일상용어가 된 ‘전통의 현대화’를 선구적으로 시도한 대표작 중 하나다. 각진 먹선으로 단순화한 인물, 화면에서 비켜낸 인물배치 등 이전 한국화와 거리를 둔 ‘파격’이 돋보인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린다. 종이에 먹·색, 221×168㎝.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오는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낼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전시에 한발 앞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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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결혼. 이왕 할 거면 잘해야 한다.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미술사에는 결혼을 잘한 남성화가는 참 많다. 아내의 물심양면 내조로 역사에 길이 남은 남편들이 많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 예외가 있다. 결혼을 망친 남성화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결혼을 잘한 부부화가도 있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다. 김기창(1913∼2001)·박래현(1920∼1976) 부부가 그들이다. 평생 서로 아낀 것은 물론 둘 다 미술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인 작업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꽤 이례적인 일이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1943년에 만났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박래현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깐 귀국한 때였다. 큰 상을 받은 만큼 한국화 원로작가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는데, 그 작가명단에 ‘조선미술전람회’를 주름잡던 김기창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별일’은 없었나 보다.

시상식이 있은 뒤 얼마 뒤, 김기창은 세월이 한참 흘렀어도 박래현과 처음 만난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외출했다가 들어서는데 마당 한복판이 환해 보였다고, 젊고 예쁜 여인이 산뜻한 흰 양장에 하이힐을 신고 단발한 모습에 ‘꿈이 아닌가’ 싶도록 눈부셨다고 회고했다. 김기창을 만나기 전 박래현은 그를 70대 노화가로 알았단다. 워낙 화단에 이름이 난 양반인지라. 그런데 웬걸. 그의 집에 갔더니 “젊고 패기에 가득 찬 미남이 우람한 체구로 태산 마냥 버티고 서” 있었다. 박래현은 그 모습에 놀랐고 아찔했다고 술회했다. 박래현이 스물셋, 김기창은 서른 살이었던 그해 초여름이었다.

첫눈에 반한 청춘남녀는 연애를 시작했지만 결혼을 허락받기는 무척 어려웠다. 김기창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밥 먹듯이 입선을 하고, 가장 높은 상인 창덕궁상과 총독상을 타고, 특선을 연거푸 했어도 박래현의 부모에게 결혼은 안 될 일이었다. 부유한 친정이 보기에 김기창은 마땅한 사윗감이 아니었다.

유학파 재원 박래현과 청각장애 실력가 김기창의 만남

김기창은 일곱 살 무렵 장티푸스를 앓으며 청각을 잃었다. 보통학교 입학식 하루 뒤부터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년을 앓아누웠다. 겨우 기운을 차렸을 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증권으로 가산을 탕진한 뒤 집을 나갔고, 어머니 홀로 장애가 있는 장남 김기창을 포함한 여덟 명의 자녀를 키웠다. 김기창은 학교에 다녔지만 공책 빈자리에 낙서만 잔뜩 그려댔다. 들리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간호사로 일하고 저녁에는 스스로 교사가 됐다. 아들을 앉혀 놓고 한글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것도 어머니였다. 화가 김은호(1892∼1979)에게 사정사정해 아들을 맡기고 그림공부를 시켰다. 어머니의 혜안은 놀라웠다. 김기창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1931)에서 입선을 했다. 열여덟 살, 첫 출품에 이룬 쾌거였다.

글과 그림을 가르치며 살 길을 터준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타계했을 때 김기창의 세상은 다시 깜깜해졌다. 야수같이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하루종일 어머니 산소에 가서 우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끝내 다시 붓을 쥐었다. 그림을 팔아 여덟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제16∼19회)에서는 4회 연속 특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스물넷에 최고상을 거머쥐었고, 스물일곱에 추천작가 반열에 올랐다. 청각을 잃고 말하는 방법도 잊은 어눌한 청년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땐 누구보다 예리하고 섬세했다. 따뜻한 온실 속에서 자랐던 박래현은 어쩌면 김기창의 이런 강인한 면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성장과정을 겪은 김기창과 박래현은 1947년 결국 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각자 작품활동에 협조는 해도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박래현의 당돌한 요청에 김기창은 기꺼이 그리하리라 약속했다. 신혼부부는 서울 성북동 집 한 칸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같은 공간을 나눠 쓰며 함께 그림을 그려 나갔다.

박래현의 ‘탈’(1958). 소무탈을 사이에 두고 취발이와 노장이 한바탕 대결을 벌이는 전통놀이 탈춤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작가가 실험해온 직선적 면 분할이 도드라진다. 인체 마디마디를 각지고 길게 왜곡해 둥글둥글한 전통적 표현법을 과감하게 벗겨냈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린다. 종이에 먹·색, 223×122㎝.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재미있게도 결혼 초반, 둘의 작품은 퍽 비슷하다. ‘흥락도’(1957)와 ‘탈’(1958)처럼 한국적 소재를 택하되 한껏 추상화한 대형 한국화다.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만들자는 공동의 목표 아래 입체파식 면 분할을 시도했고, 광복 후 왜색을 탈피하자는 한국화단의 요구를 수용해 연한 색을 사용했다. 광복 이전 그들이 즐겨 그리던 매우 사실적이고 진한 색채의 그림과는 전혀 다르다. 이전의 그림으로부터 굉장히 빠르고 과감하게 빠져나온 것인데 이렇게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모르긴 해도 서로 격려하고, 상대의 작품에 자극을 받으면서 함께 발전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둘의 작품에 차이점도 있다. ‘흥락도’는 힘 있고 단순한 선과 큼직한 색면을 사용한 반면, ‘탈’의 선은 비교적 가늘고 면이 좀 더 잘다. 김기창이 풍물놀이의 역동성과 흥겨움을 강조했다면, 박래현은 소무탈을 사이에 두고 취발이(술 취한 중)와 노장이 벌이는 갈등관계를 암시했다. 또한 김기창의 화면에서 빠르고 강렬한 장구·징·소고 소리가 들리는 것과 달리 박래현의 화면은 느리고 구슬픈 소리로 채워져 있다. 새로운 한국화를 향해 함께 나아가면서도 세부적인 방법은 독립적이었던 것인데, 이는 작품활동에 협조는 하되 간섭은 하지 말자던 약속을 충실히 지킨 열매였다.

1960년대 이후로 둘의 작품은 완전히 달라진다. 여전히 사이좋은 부부였지만 화면에서만큼은 자신만의 세계를 단호하게 개척해 나갔다. 박래현은 점점 더 추상을 향해 나아갔고, 김기창은 전통화를 친근하게 변형시킨 일명 ‘바보산수’라는 장르를 일궈냈다.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1967). 전통음악인 아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모습을 상상한 작품이다. 빠른 필치로 스케치하듯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붉은 옷의 악사 앞에 날린 하얀 학 세 마리의 날갯짓이 작가에게는 들리지 않은 소리를 대신한다. 이렇듯 전통화를 친근하게 변형하는 식으로 작가는 1960년대 이후 아내 박래현과 다른 길을 걸었다. 종이에 먹·색, 86×9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내 세상 떠난 뒤 ‘유작전’ 열며 작품 기린 남편

작품은 달라져도 늘 함께였다. 결혼식을 올린 1947년부터 거의 2년에 한 번꼴로 열 번이 넘는 ‘부부전’을 열었다. 그림을 함께 완성하기도 했다. 해외여행도 함께 떠났다. 집 안팎의 대소사를 챙기느라 그림 그리는 시간이 아쉬웠던 아내의 마음을 헤아린 김기창은 박래현의 미국 뉴욕 유학에도 선뜻 찬성했다. 7년에 가까운 아내의 유학생활을 그는 묵묵히 기다렸다. 박래현이 56세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김기창은 박래현의 ‘유작전’ ‘10주기전’ ‘판화전’ 등 여러 전시회를 열었다. 아내의 작품이 묻히지 않도록 애쓴 거다. 생전 남편을 자신보다 앞세웠던 박래현의 작품은 그간 그늘에 가려져 왔지만 예술가로서 아내의 역량을 김기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년에 김기창은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로 거처를 옮겼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한옥을 짓고 깊은 적막감 속에서 그림에 몰두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회관과 직업훈련소를 짓는 등 복지에도 힘 썼다. 그러다가 눈이 많이 내리던 2001년 1월 어느 날 2만여 점의 작품을 남긴 채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 여기던 아내가 있는 하늘로 떠났다.

결혼을 잘한다는 것이 나보다 나은 조건의 상대를 고른다는 뜻은 아닐 거다. 나보다 상대를 낫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종국에 잘한 결혼을 만드는 걸 거다. 김기창·박래현 부부가 꼭 그랬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를 귀하게 여겼다. 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살았다. 그 마음이 이들을 미술사에 아름다운 부부로, 존경받는 예술가로 길이길이 남게 했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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