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한 나라의 중앙은행에 근무한다는 것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역사도 굴곡이 많았지만 금융시장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주 “300조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주인공은 한국은행 금융시장국 채권시장팀의 김성민 팀장이다. 김 팀장은 외환위기 전후로 공개시장팀에서 지준관리와 통안채 발행을 담당, 시장의 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김 팀장의 눈은 한국은행 고유의 업무와는 별도로 변화하는 시장환경에 맞춰져 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정크본드’를 택했을 정도로 채권에 관심이 많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오퍼레이팅의 기법과 타이밍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는 김 팀장은 “우리 채권시장이 발전하고 있지만 좀 더 세련되어져야하고 분석 기법도 다양해져야한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시장의 메커니즘을 모르면 안된다. 시장의 머리꼭대기에 올라가 있어야 오퍼레이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 팀장은 현재 채권시장 동향을 체크하는 부서를 맡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채권시장의 미묘한 움직임까지도 잡아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금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은의 통화정책도 채권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김 팀장은 한국은행과 시장의 연결고리로서 통화정책의 기본 자료를 수집하는 셈이다.
채권시장 입장에서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당국자이면서 통안채라는 채권을 발행하는 채권공급자다. 채권시장의 유동성을 조절하는 주체이면서 게임의 한 당사자인 것이다. 김 팀장은 한은의 ‘입’으로서, 때로는 ‘귀’로서 채권시장과 호흡을 함께하고 있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중앙은행은 한 나라 경제의 안방마님과 같다.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선의 임무이고, ‘은행의 은행’으로서 금융시장을 조절하는 역할도 한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의 위상이나 통화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독립성 등은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 한은 조직의 특성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은맨들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채권맨이면서 한은맨일 수 밖에 없는 김 팀장의 생각을 들어봤다.(김 팀장 약력은 인터뷰 기사 하단 참조)
<박사학위를 마치고 은행에 복귀>
-한국은행에 입행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연세대 경제과를 78년에 졸업하고 나서 바로 입행했습니다. 제가 대학 4년이던 1977년이 단군 이래로 최대의 호황기라고 불리우던 시기였습니다. 기업체들도 사람을 확보하려고 난리들이었죠. 그래서 군대를 가지 않은 상태에서 취직할 곳이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알아보곤 했어요. 그 몇 군데 중 하나가 한국은행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행은 그 당시에도 군대미필자를 뽑아줬고 78년 1월에 입행할 수 있었어요. 입행 후 2달 정도 다니다가 군대를 갔습니다. 80년 6월에 제대한 다음 2년 정도 근무하고 82년 유학을 떠났습니다.
-유학은 한국은행에서 보내준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사비를 들여서 갔습니다. 한국은행은 휴직만 시켜줬는데 한은으로서는 경비를 절약할 수도 있고 나중에 학위를 가진 인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 아쉬울 게 없는 거죠.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웃음)
-학위는 언제 끝마치셨나요.
▲일단 브라운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경제학 공부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래서 텍사스공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88년 8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경영학에서는 재무관리 부분을 공부했어요.
-학위를 할 경우 은행 내의 직위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하군요.
▲중간입니다. 우대해주는 것도 아니고 홀대하는 것도 아닌 중간대우에요. 제가 82~88년까지 6년 동안 자리를 비웠는데 그 사이 제 입사동기들은 3번에 걸쳐 승급을 했습니다. 저는 86년 12월에 승진한 것으로 의제됐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아까도 말씀하셨듯 학위를 받고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돌아오셨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사실 당시 미국에서 경영학 교수들의 대우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살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한국은행도 괜찮은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은행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일을 해보니 재미가 느껴졌어요.
<"한국은행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으니까 채권을 공부한 것”>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뭡니까.
▲미국 정크본드 시장에 관한 겁니다.(웃음)
-유학시절부터 채권시장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셨군요.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한국은행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으니까 채권을 공부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논문을 쓰기직전 페이퍼를 써 보고 기간구조(constructuring) 쪽보다는 default risk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비교우위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논문준비에 들어가 최대한 빨리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저는 논문준비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제학으로 석사까지 받았지만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꾸고나니까 마케팅이론부터 이것저것 들어야 할 과목이 한 두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래서 남들보다 coursework도 오래 걸렸고 시험 성적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가 자격시험을 한 번에 붙지 못하고 두 번씩 시험보고 붙는 사람이거든요(웃음). 그래도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87년 12월이 됐고 논문제출은 88년 7월에 했습니다.
-미국에서 정크본드가 이슈화됐던 시점이 바로 논문을 준비하시던 무렵이네요. 그렇지만 한국 채권시장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셨군요.
▲정크본드가 한때는 대단한 관심을 불러모았었죠. 제 지도교수가 “주제가 너무 좋으니까 공저로 해서 논문을 보강해서 쓰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귀국하고 나서 조금 더 손을 보려고 했는데 이일저일에 치이다보니 그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좀 아쉽기도 합니다.
-정크본드 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이 마련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회사채 시장의 문제해결을 위해 정크본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죠. 총론에서는 맞는 얘기입니다만 기본적인 금융문제 해결이 안 된 상황에서는 미국 정크본드 시장에서도 유동성이 급격이 줄어들게 됩니다. 현재 우리시장이 좋은 상태가 아니니까 이를 잘 살리는 것이 참 어려워요. 묘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계속적으로 고민해야겠죠. 나름대로 고민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않아 괴롭습니다. 하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경제나 경영학을 전공할 생각이셨나요?
▲공부에 대해서는 큰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구요. 법학에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경영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 건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제 은사 중 한 분께서 “숫자만 많고 공부하기 힘든 경제학하지 말고 좀 실용적인 학문을 하라”고 조언하셨어요. 그 분이 계속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미국에 가보니까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교수되는 것 말고는 별로 쓰일 데가 없더군요.
-귀국해서 한은에서 맡으신 업무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의 금융제도과에 잠시 있다가 조사 제 1부로 옮겼습니다. 조사부에서는 주로 금리에 관한 논문을 썼었죠. 통화금융과로 갔더니 제가 재무관리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기업 자금조달구조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최연종 부총재께서 당시 조사부장을 맡으셨는데 “기업들이 어떻게 자금 조달과 운용을 하고 거기에 따른 문제점이 뭐냐”를 분석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전경련에서 반박 전화를 하더라구요. (웃음)
제가 그 보고서를 좀 부정적으로 썼거든요. 80년대 후반당시에는 경기가 호황이었으니까 기업들이 여유자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죠. 제 보고서의 논조는 ‘여유자금이 있으면 그걸로 기업 재무구조 개선에 힘써야지 다른 일 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것이었는데 그 쪽에서는 무척 강력하게 반발했어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쓸 수 있느냐?”고 말이죠.
<국제통화기금(IMF)과의 묘한 인연>
-채권시장과 직접적으로 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93년 이후입니다. 통화금융과 근무가 끝나고 1년 동안 IMF에 가 있었어요.
- IMF 근무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프로그램에 관여했던 IMF 관리들이 그 당시 모두 제 위에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국장은 나이스 국장이었고 수석부국장은 아게블리였으니까요. 그 외에도 부국장 중 하나는 현 IMF 아시아국장인 류스케 호리구치고 존 도스워스도 당시 과장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재미있는 인연이네요.
▲네. 특이한 인연이죠. 과장이 되고난 다음부터는 시장과 접한 부서에서만 일했어요. 제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외환위기 와중에서 시장과 밀접한 곳에 있으면서 이를 몸소 겪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경재 전 기업은행장께서 제가 IMF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국제담당 이사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저보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외환시장 쪽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국제부 외환시장과에서 조사역과 과장을 하면서 2년을 보냈어요. 그 다음 자금부 시장조사과장을 거쳐서 97년 3월부터 99년 5월까지 공개시장과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공개시장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외환위기의 시작부터 진행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셈인데 지금 돌이켜봐도 이때처럼 많이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97년 11월말에 종금사 문제가 터지면서 1주일에 2~3일은 은행에서 잠을 잤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도 퇴근시간이 새벽 3시였으니까 말입니다. 외환위기가 터진 후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IMF 관리들을 비롯해 S&P 관계자들, 심지어는 헤지펀드 사람들까지도 만났어요. 그 전에 만났을 때는 별볼일 없던 사람들도 외환위기를 겪고 나니까 거물로 둔갑하는 경우마저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국에 있는 미국의 유명한 헤지펀드 관계자를 만났는데 그 다음날 신문을 보니까 그 사람이 저를 만난 다음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면담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그 사람이 나중에 브라질 중앙은행 총재가 됐습니다.
(인터뷰 중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