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 첫 국립극단장·70年 연극외길…'백성희' 누구인가

김미경 기자I 2016.01.09 16:41:23

韓 연극계 산증인 8일 병석서 눈 감아
17살 '봉선화' 데뷔·'3월의눈·바냐아저씨' 유작돼
연기 기본은 기교 아닌 성실함
"배우로서 살아온 인생…행복했다"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 12일 영결식

지난 8일 향년 91세로 별세한 배우 백성희. 고인은 이날 밤 11시18분께 서울의 한 요양병원 입원 중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현존하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원로단원이었다. 17세에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후 70년 넘게 한 길만을 걸어온 한국 연극사의 산증인이다(사진=국립극단).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우연히 일본 소녀가극단 ‘다카라즈카’의 홍보물을 보고 연극인생을 살 것을 가슴에 품었다고 했다. 1943년 극단 현대극장 입단한 17살 꿈 많은 소녀는 오로지 연극 한 길만 걸어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 현대사의 험난한 고비를 거치면서도 한결같이 무대를 지켰다.

배우 백성희(91·본명 이어순이)가 8일 밤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지난해 가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서울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 투병중 이날 밤 11시18분경 병석에서 눈을 감았다. 201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3월의 눈’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마리아’를 연기한 ‘바냐아저씨’는 고인의 유작이 됐다.

2013년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배우 변희봉(왼쪽)과 고인이 된 백성희(사진=국립극단).
그의 삶은 한국 연극의 역사다. 본명 이어순이(李於順伊)로 1925년 9월 2일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낙랑극회·신협에서 활동했으며 1972~1974년과 1991~1993년 국립극단장을 맡았다. 2011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세워졌다.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는 신조 아래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서 다양한 역을 맡았다. ‘봉선화’(1943),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강 건너 저편에’(2002) 등이 대표작이다. “발음과 대사에 공을 들인다”고 했다. “배우는 슬픔에 메여 울어도 대사만큼은 틀림없이 들리게 해야한다”는 원칙도 엄격히 지켰다.

1956년 첫 영화 ‘유전의 애수’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연극 연기의 힘을 믿었던 고인은 ‘봄날은 간다’(2001) 외에는 거의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

19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한 단장직선제에서는 최연소 여성 국립극단 단장으로 선출돼 연극계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년 다시 한 번 국립극단 단장에 추대됐다. 2002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동아연극상(1965), 대통령표창(1980), 보관문화훈장(1983),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4), 이해랑연극상(1996), 대한민국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받았다.

고인은 지난해 후배들의 도움을 얻어 지난 12월 15일 회고록 ‘백성희의 삷과 연극: 연극의 정석’을 발간하기도 했다. 김남석 부경대 교수가 지난해 4월부터 고인의 인터뷰와 구술 채록, 과거 인터뷰 분석 등을 통해 정리했다. 연기 입문 계기부터 국립극단 단원 시절, 한국 연극에 대한 제언 등 백씨의 연극인생이 640페이지에 걸쳐 담겨 있다. 김 교수와 고인의 대담을 비롯해 평론가 서연호, 연극배우 김금지, 연출가 임영웅 등 연극계 명사 5인의 인터뷰를 담았다.

다음은 회고록에 수록된 ‘배우로서 살아온’ 고인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젊은 남녀의 일몰이 같지 않다는 사실에,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연극에 대한 소회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나의 삶을 구성했다면, 나의 삶은 어쩌면 대단히 가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연극이 있었고, 그 연극은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게 만들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참으로 오랜 여행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오는 12일 오전 8시 30분이다.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으로 치러지며 12일 오전 10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이후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前)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가 열린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다.

2014년 2월 ‘제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공헌상을 수상할 당시 소감을 말하고 있는 연극인 백성희의 모습(사진=이데일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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