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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각박해지는 세계의 점심

오마이뉴스 기자I 2006.02.16 11:09:38

[7개국 시민기자 공동기획] 그래도 밥은 천천히 음미해야 ①

[오마이뉴스 제공]

▲ 점심식사가 가능한 프랑스 레스토랑
ⓒ 피에르 주
점심식사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당신의 점심식사는 10분만에 해치우는 패스트푸드와 콜라인가, 아니면 와인을 곁들인 풀코스 메뉴인가?

최근 스페인에서는 오후 6시면 정부청사 건물을 모두 닫아야 한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통과로 인한 예기치 않았던 여파는 스페인의 전통적 시에스타(siesta, 점심 이후의 낮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보통 두세 시간씩 점심과 낮잠을 즐긴 뒤 밤 9시경 느지막한 시간에 퇴근하기로 유명한 스페인 사람들은 이제 1시간 이내로 점심식사를 줄여야 한다. 공무원들의 점심식사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민간 기업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은 자명한다.

이 법률은 표면상으로는 직장인들이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취지로 마련되었지만 즐거움보다는 효율성·생산성을 강조하는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갈 수록 경쟁이 치열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페인의 직장인들은 휴식시간을 희생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협동적인 사람인지를 보여 주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날>은 세계의 시민기자들에게 각국의 점심식사에 대해 기고를 요청했다. 점심식사가 사업상 필요한 절차인지, 아니면 즐거움을 위한 것인지, 쌀을 주식으로 하는지 빵을 먹는지, 뜨거운 음식을 먹는지 혹은 차가운 음식이 나오는지, 혼자 주로 먹는지 아니면 여럿이 같이 먹는지.

프랑스와 영국, 일본,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등 7개국의 시민기자들이 이 기획에 참여했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점심식사 행태가 각국의 고유한 문화와 국민적 특질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컴퓨터 앞 '뚝딱 점심'부터 1시간 반 휴식같은 식사까지


'점심 식사' 6개국 말로 알아보자
-덴마크: 프로코스트 (frokost) -프랑스: 드쥐네 (déjeuner)-독 일: 미탁에센 (MIttagessen) -이태리: 프란쪼 ( pranzo)-포르투갈: 알모쏘 (almoço) -스페인: 알무에르쪼 (almuerzo)-스웨덴: 런치 (lunch)
릴리 율리안티 기자는 3개국에서 거주한 자신의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눴다. 인도네시아에서 자란 율리안티는 호주 멜버른에서 일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샌드위치나 햄버거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뚝딱 점심 (express lunch)'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그는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 2시 반까지인 인도네시아식 점심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일본에서의 점심식사는 정확히 2시간이며, 이 시간을 활용해 낮잠까지 잘 수도 있다고 한다.

프랑스인 피에르 주 기자는 주당 35시간의 노동시간이 규정돼있지만 사무직 직장인들이 통상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 혹은 더 늦게까지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에르 주 기자는 "모든 직장인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허겁지겁 세모꼴의 샌드위치를 먹어 치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덧붙인다. 점심시간은 직장인들이 무척 고대하는 휴식시간이며, 1시간이 보통이지만 아주 바쁜 날이 아니면 30분 정도 더 시간을 갖는 것이 허용된다고 한다.

알리 산와르 기자는 방글라데시의 대표적 점심식사가 끓인 쌀, 린텔, 기름에 튀긴 시금치, 채소를 곁들인 소고기 혹은 생선 커리라고 말한다. 점심식사 시간은 한시간 정도지만, 구내식당에서 먹는 식사는 15분 이상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르미다 산체스 기자는 필리핀 사람들은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강조한다. 필리핀에서는 하루 세끼가 아니라 여섯끼를 먹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게 산체스 기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쌀과 채소 등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햄버거나 인스턴트 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경향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덧붙인다.

필리핀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잘 놀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주위와 잘 어울리다고 말한다. "신앙, 신뢰, 성실함에 덧붙여 음식이야말로 인간관계를 맺는 중요한 관건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루파 카렐 기자는 "네팔사람들은 점심에 콩, 쌀, 커리를 먹는다"면서 "좋은 식사가 국가의 번영과 안녕에 기여한다"는 네팔인의 믿음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티핀(tiffin)이라 불리는 점심식사는 30분에서 45분 정도로 그다지 길지 않다"고 말했다. 네팔의 점심식사는 보통 2시에 시작되며, 직장에서 집이 가까운 경우 집에 가서 먹기도 한다.

영국인 그래함 몰 기자의 기사가 가장 독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몰 기자는 영국의 사무직 직장인 4명 중 1명은 점심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직장인들 중 62%는 동료나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일에 '전념하지 않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차라리 '배를 곯는 것'이 낫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직접 세계시민기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호주·인도네시아·일본] 바쁜 서양, 느긋한 동양 (릴리 율리안티)


▲ 인도네시아식 샐러드 가도가도. 여러 야채들을 삶아 땅콩소스를 뿌려 먹는다.
ⓒ 김동희
내가 멜버른에 있는 국제방송사에서 일할 때, 직장동료들은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짧은 시간에 끼니를 해결하는 '뚝딱 점심(express lunch)'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서 구내식당에서 구입한 탄산음료와 함께 먹는 것이다.

우리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에 눈을 고정시킨 채 계속 일을 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명백한 것은 이 환경에서 딱히 규정된 '점심시간'이란 없었던 것이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웹검색을 하거나 이메일이나 온라인 뉴스를 체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시대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책상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점심시간의 일종의 변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과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테이크아웃 점심식사는 휼륭한 선택이다. 그렇지만 나같은 아시아 여성들에겐 이런 서구식 점심식사는 정말 짜증스럽다. 왜냐하면 내 고향인 인도네시아에는 주중과 주말 모두 잘 차려진 점심을 먹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반부터 오후2시 반까지 인도네시아 대도시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는 '점심휴식'을 위한 중산층들의 습격이 이루어진다. 인도네시아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경우 푸짐하게 차려진 다양한 종류의 정찬(보통 쌀과 닭, 생선, 채소요리 등)을 1시간에 걸쳐 즐기게 된다. 이 경우 점심시간은 1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언론인으로 일할 때, 공무원들의 점심식사 시간은 오후 3시까지 계속되기도 하였다. 정부청사 건물은 보통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텅텅 비워져 있으며, 고위관리의 경우 오후 내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점심, 식당에선 중산층의 습격이


▲ 일본 고베에서 한 직장인이 즉석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 캐타 드 라 크루즈 (Kathy de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도쿄에서는 점심시간에 값싼 도시락을 사려고 인기있는 레스토랑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수백 개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자리잡은 시부야에서는 1천엔에서 2천엔(한화 8천원에서 1만 6천원) 정도면 주요리에 뷔페식 샐러드와 후식까지 나오는 점심도시락을 살 수 있다. 저녁식사는 보통 2배 정도 비싸다.

일부 레스토랑은 점심도시락을 오후 3시까지 팔고 있으며 오후 5시까지 파는 곳도 있다. 테이크아웃은 상당히 대중적인 점심식사 방법이며,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렇지만 일반식당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은 햄버거같은 테이크아웃 메뉴가 아닌, 일본식이든 외국식이든 정식으로 차려진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길 원한다.

규정 준수가 매우 중요한 일본인지라, 주중의 점심시간은 정확하게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이다. 점심식사하러 나온 직장인들은 유니폼이나 검은색 양복 등으로 쉽게 구분된다.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는 것은 가능한가?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는 것은 물론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내 사무실에는 여성전용 침실이 있다. 이 침실은 침대 하나가 놓여진 캡슐호텔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생리 중이거나 야간근무를 해야 하는 여성직장인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직장동료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 공간은 점심식사 후 시에스터 용으로 안성마춤이다. 딱 한 번 이 방에서 자본 적이 있는데, 일중독으로 유명한 이 나라에서 점심식사 후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는 그 느낌이란 참 묘했다.

[프랑스] 최소한 1시간은 먹어야지 (피에르 주)

대개 프랑스의 사업회의가 그렇듯, 몇년 전 내가 참석했던 대서양 해안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프랑스의 대표적 제조업체 본부에서 있었던 회의도 예정 시간을 초과해 오후 1시 반에서야 끝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자 했지만, 파리에서 있는 또다른 회의에 참석해야 했던 나는 초대를 거절하고 다음 기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회의장 1층 로비로 달려가 안내데스크에게 택시를 불러줄 것을 부탁하려고 했지만, 담당자는 자리를 비웠고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그만 갇혀버린 나는 회의를 주최했던 이 회사 직원을 가까스로 다시 만나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그 직원은 "로비가 비워져 있는 건 당연하다, 담당 직원은 점심먹으러 갔다"고 설명했다. 이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의 본부 건물이 점심시간에는 돌보는 사람 없이 내버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들 중 프랑스를 사업차 방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점심시간을 전후로 도착하거나 떠나게 된다고 해서 특히 염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자국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지만, 국제 비지니스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도시에 위치한 모든 프랑스 기업들은 점심시간에도 직원들을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직장인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세모꼴의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고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시라. 프랑스인들은 점심시간을 긴긴 근무시간에서 꼭 필요한 휴식시간으로 생각한다.

근무시간이 길다고? 주당 35시간 노동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나라에서 말인가? 사실 주당 35시간 근로는 글로벌 경쟁시대에서는 통하지 않는 규정이다. 대부분 기업들은 초과근무를 하는 대신 휴가를 더 주는 식으로 규정을 변용해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 사람들은 상당히 긴 휴가를 즐길 수 있는 편이다. 공무원들의 경우 최대한 9주 정도 된다.

그렇지만 하루 근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 사무직의 경우 때에 따라 훨씬 더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점심시간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1시간의 휴식시간인 셈이다. 점심시간은 오후 1시부터 시작되며, 아주 바쁘지 않은 경우 직원들이 30분 정도 시간을 더 가지는 것에 대해 경영진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점심식사 시간의 '메인 메뉴'는 식사가 아니다


▲ 프랑스 빵집에서는 가져가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제공한다.
ⓒ 피에르 주
그렇다면 점심시간에는 무엇을 하는가?

놀랍게도 점심을 먹는 것이 주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점이나 관공서가 문을 닫은 후 퇴근을 하기 때문에, 점심 시간은 개인용무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데 종종 이용된다. 크리스마스 때나 세일 기간에 옷가게들이 점심시간 동안 문을 닫는다면 장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점심시간에 문을 닫으면 수많은 잠재적 고객들을 놓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가격에 가장 좋은 옷을 사고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직장인(대부분 여성)들은 상점에서 치열한 구매전쟁을 벌인다. 이걸 모르고 우연히 들른 관광객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

쇼핑을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당연히 점심먹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불랑제리(Boulangeries, 빵집)'가 근처에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점심시간에 빵집 진열대들은 금방 만든 샌드위치로 가득 차 있는데, 바게트 빵을 삼등분해 만든 샌드위치를 각각의 빵집에서 사용하는 고유한 재료들로 속을 채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바게트에 햄과 버터를 바른 '르 파리지엥 (le Parisien)'이다.

가끔은 회사업무와 고객을 위해 점심시간을 사용할 경우가 생긴다. 프랑스식 사업문화는 저녁보다는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것을 선호한다. 저녁은 가족과 개인생활을 위해 써야한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업무상의 점심식사는 보통의 점심시간만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지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게다가 업무상 점심식사에서 실제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고, 사업에 관한 논의는 식사 전후에 있는 회의에서 하게 된다. 점심식사는 순순하게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사업상의 점심식사는 보통 오후 1시에 시작해 3시경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이 식사의 목적은 고객에게 좋은 시간을 선사하기 위한 것이고, 보통 풀코스 정찬에 질좋은 와인이 곁들여진다. 특별히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심식사를 통해 사업상 교제의 폭을 넓힐 수 있으므로 경영진에게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프랑스의 일부 우량기업들은 사업파트너와 주요 주주들만을 위해 요리사가 딸린 사내 레스토랑을 두고 있을 정도이다.

몇달 전 파리에서 나는 사업상 아는 분의 회사에서 겨자를 곁들인 토끼고기와 부르고뉴 지방의 보슨-로마니에(Vosne-Romanee)이라는 적포도주를 즐긴 적이 있다. 이 레스토랑은 회사본부 꼭대기 층에 있어 개선문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 점심식사에 아주 만족했다.

개인용무나 사업상 스케줄이 없는 경우 점심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친구나 가까이 지내는 직장동료들과 유유자적하며 점심을 먹으면 된다. 대개 사람들은 저녁메뉴를 고르는 것만큼 점심식사에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항상 맛있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값싼 음식을 제공하는 구내식당에서 먹는 게 보통이다.

구내식당이 없는 소규모 회사들은 회사와 제휴를 맺는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경우에 한해서 직원 점심식사 비용의 절반을 지불한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수백 개의 카페들과 델리들은 '오늘의 메뉴'를 제공하면서 이들 직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면서 주말 계획이나 2주 후에 있을 휴가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 오늘의 메뉴는 뭐지?
ⓒ 피에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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