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별로 하지 않았다. 지금도 시장 관련 전망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물어보면 답하는 정도. 시장을 예측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내 입장이 중립지대이기 때문에 이해상충 문제 없이 내 생각을 얘기할 수 있다. 내가 기관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재야 고수도 아니지 않는가. 시장과 관련된 코멘트로 내가 돈을 버는 일은 없는데, 그런 이해관계를 만드는 순간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런 측면도 있겠지. 그렇지만 시장에서 기관과 개인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관투자가들이 굴리는 돈은 개인들이 맡긴 돈 아닌가. 지금의 시장은 상당히 체계화돼 있다. 전문적인 리서치 집단이 아니고선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2000년 이전과는 분명 차별화 돼 있다. 다만 시장이 너무 과도히 나갔을 때, 극단으로 치달을 때, 그리고 내 생각에 이건 아니다는 확신이 들 때는 강하게 얘기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하반기 중국시장에 대해선 ‘이건 아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표현이 뭣하지만 ‘똥밭에 눈이 내린 격’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점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어필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증시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증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시장 전망이 51% 맞으면 재벌 되는 거다. 나도 통계적으로 보면 50% 정도 맞는다. 동전을 던져도 그 정도는 나오는 것 아닌가. 크게 실수한 부분이 있는데 지난해 말 다우지수 1만선, 상해지수 2500선까지 내려간다고 경고하면서 한국시장 차별화 가능하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틀렸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같은 신용위기, 중국은 설비과잉에 따른 재고조정을 우려했다. 한국에 대해선 1500을 바닥으로 반등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무너질 지는 몰랐다. 향후를 전망한다면 미국은 지금 1단계 하락 정도만을 통과한 것 같고, 중국도 회복되려면 2-3년 정도 지나야 할 것 같다. 한국 경기는 내년 하반기 정도부터 좋아지지 않을까. 주식시장은 이보다는 좀 빨리 반등하겠지. 현재 한국 주식시장은 현저히 싸지도 않고, 그렇다고 고평가된 상태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다”
-박 원장이 생각하는 투자란 무엇인가.
“투자란 잉여를 늘리려는 행동이고, 투기는 결핍을 메우려는 행동이다. 잉여의 크기가 기회의 크기라면, 결핍의 정도는 리스크의 크기다. 쉽게 말해서 여윳돈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빚내서 주식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정상적인 판단을 못한다. 가능성만으로 돈을 빌리는 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다”
-개인이 현 상황에서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집도 마련하고, 차도 사고 싶고, 교육비도 마련하고 싶어서 주식 투자하면 백전백패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애들도 웬만큼 컸고 ‘이제 남은 돈으로 뭘 좀 해볼까’ 이렇게 돼야 성공한다. 개인투자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는 데 결핍은 투자로 메꾸는 게 아니다. 땀과 노력으로 채우는 것이다. 부족분을 투자로 메꾸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박원장의 땀과 노력은 무엇이었나.
“아버님이 경찰공무원이었는데, 5공 시절에 과로사 하셨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어머님이 사기까지 당하면서 큰 빚을 졌다. 종합병원 그만두고 개업한 이유도 월급으로는 빚을 갚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충남 공주에서 93년에 병원을 개업했는데 첫날 환자가 28명 오는 것 보고 이제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한달 지나니까 200명, 6개월 지나니까 300명으로 불어났다. 5년간 병원을 열면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24시간 365일 병원 문을 열었다. 야전침대 놓고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환자를 봤다. 당시 공주 같은 소도시에선 밤에 아프면 갈 병원이 없었다. 소문이 나니까 논산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 1년 반 지나니까 빚을 다 갚게 되더라. 개업 3년차 땐 의사 1인당 환자 진료실적으로 전국 5위권에 들었다. 그러면서 환자들한테 고마웠다. 내 빚도 갚게 해주고, 내 삶도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었으니...”
-계속 의사만 했어도 돈 더 벌었을 텐데.
“빚 갚고 남는 돈으로 투자해서 투자수익도 꽤 올렸다. 병원 건물 계약이 5년 이었는데, 병원이 너무 잘 되니까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더라. 그때 생각했다. 더 이상 돈에 욕심내선 안되겠다. 그래서 다시 병원을 열지 않고 안동으로 왔다. 1년 이상 푹 쉬다가 2001년 지금의 신세계병원을 열었다. 놀 때는 매일 같이 사람 만나고 다녔다. 매일 전화해서 밥사는 게 일이었다. 새로운 이를 만나서 새로운 트렌즈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에 대한 눈을 더 틔었다”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는데, 정치에 관심은.
“추호도 없다. 당시 민주당에서 비례대표의원으로 날 추천하겠다고 해서 픽 웃고 말았다. 그렇다면 심사위원 맡아달라고 해서 그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격 없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것은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시민으로 살고 싶다. 50이 되면 내 아호는 ‘시민’이다. 지금은 ‘시골의사’ 박경철이지만 그 땐 ‘시민’ 박경철이 되는거다”
-시민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시민은 백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capacity for critical analysis 가 되겠다. 비판적 분석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사이비다. 흔히 야만적 지식인들이 하는 행위다”
-자녀 교육에 대한 철학이 있나. 경제교육 같은 것도 따로 시키는지.
“자녀들은 부모를 따라하게 마련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앞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 자녀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쫓아온다. 사람의 뒷모습은 추하기도 하고, 때가 묻어있기도 하다. 자녀들에게 내 뒷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개인의 비전은 무엇인가.
“이상한 얘기 같지만 목표가 없다. 과거에도 목표는 없었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를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닥친 일을 성실히 했고, 다행히 지금까진 그 이후에 할 일이 반드시 생겼다. 기회가 닿으면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바램은 있다”
@박경철 원장과의 인터뷰는 2시간 남짓 진행됐다. 처음엔 30분 정도만 예정됐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터뷰 시간이 길어졌다. 인터뷰어로써, 또 인터뷰이로써도 박원장은 프로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후 내가 인터뷰를 한 것인지, 당한 것인지 알쏭달쏭할 정도였으니까. 시시콜콜한 가정사와 개인사까지 솔직히 말해준 박 원장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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