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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소현의 일상탈출)(23)음침한 게스트하우스

권소현 기자I 2006.12.29 15:42:52
[이데일리 권소현기자] '너무 음침해.. 1분도 더 있기 싫어..빨리 벗어나고 싶어...'

혼자 여행할 때였다. 델리 빠하르간지의 한 게스트하우스. 다섯평 남짓한 작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으려니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온다.

작은 창문이 있었지만 빛 한줄기 들어오기에도 빠듯할 정도로 앞건물이 바싹 붙어있다. 침대 시트와 베갯잇은 한달은 안 갈은 듯 하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빈대와 벼룩 때문에 침대 귀퉁이에 엉덩이만 살짝 걸쳐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17시간의 긴 기차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델리에서 피로를 풀기는 커녕 1분도 있기 싫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인도 델리의 빠하르간지에 위치한 한 낡은 건물
뭄바이에서 델리로 다시 온 것은 암리차르를 가기 위해서다. 암리차르는 델리를 지나 북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하는데 급행열차라 새벽에 타면 3시간이면 간다. 델리에서 하룻밤만 자면 되는 것이다.

델리에 도착해 역을 나서자마자 온갖 인도인이 앞을 가로막는다. 쌀가마니 같은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데 앞으로 한걸음 떼기조차 힘들다.

그래. 어차피 빠하르간지의 게스트하우스들이 다 비슷비슷한데 아무나 골라서 따라나서자. 그중 가장 불쌍해 보이는 사람을 골랐다. "당신네 게스트하우스로 갈테니까 안내해요"

얼굴이 까만 이 인도 남자는 신이 나서 앞장선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을 밀어내면서 길을 터줬다.

10여분을 걸어서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아주 구석에 쳐박혀 있는 곳이다. 숨이 탁 막혔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다시 길바닥으로 나서 또 다른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헤메기도 싫고 어차피 하룻밤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짐을 풀었다.

이 작은 방에는 빛이 들어올 틈이 없다. 희미한 백열등은 분위기를 더욱 음침하게 만든다. 에어쿨러에서 나오는 바람은 시원하기는 커녕 끈적끈적하기만 하다. 좁고 어두운 방 안은 정적이 흘러 에어쿨러 돌아가는 소리만 더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짐을 풀고 샤워라도 할까 하고 욕실에 들어갔더니 바닥에서 뭔가 꿈틀거린다. 지렁이다. 지렁이를 본게 도대체 몇년 만인가.

어렸을때 비만 오면 아스팔트로 기어나와 꿈틀거리다가 쨍하고 햇볕이 나면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렸던 지렁이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햇볕이 나기 전에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까 안타까웠다.

그런데 지렁이를 하수구로 밀어넣기 위해 물을 몇 바가지씩 쏟아붓고 나와서는 넓은 침대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가 지렁이 못지 않게 불쌍했다.

이곳에 더 있기 싫은데 또 나가야겠다는 의욕도 없다. 꼼짝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침대에 침낭을 넓게 깔고 정 가운데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세상은 혼자다. 결국은 혼자 사는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이런 여행을 시작하게 됐는가부터 왜 인도로 왔을까, 왜 많은 게스트하우스 중에서도 이런 곳에서 우울해하고 있을까.. 수많은 질문을 던져보고 또 답을 찾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시 욕실에 들어가봤다. 지렁이는 사라졌는데 이번에는 전구가 문제다. 처음부터 밝지도 않았지만 깜빡깜빡 하더니 아예 꺼진다.

한사람이 간신히 오르내릴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1층까지 내려갔다. 욕실 전구에 문제가 있다고 하니 얼굴에 좌르르 흐르는 기름으로도 모자라 머리를 7대3으로 정확히 나누고 기름을 잔뜩 발라 넘긴 인도 남자가 "I'm your service man"라며 나선다.

이것저것 한참을 만지작거리더니 깜빡깜빡 하는 정도로 고쳐놨다. 원상복귀는 힘들단다. 이 남자, 더 할 이 없는 것 같은데도 밍기적 거리면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야릇한 표정을 짓고 서서는 계속 쓸데 없는 말을 건다. 속이 갑자기 메스꺼워진다.

이 인도 남자를 억지로 문 밖으로 밀어내고 욕실로 들어갔더니 이번엔 계속 깜빡거리는 전구 때문에 현기증이 난다.

최대한 빨리 샤워하고 짐을 정리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니까 어지럽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한참을 그렇게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델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12시를 넘겨서야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다시 음침한 공간, 빨리 잠 드는 것이 상책이지만 잠도 안 온다. 침낭을 깔아도 시트에 살고 있는 벼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려움에 밤새 온 몸을 벅벅 긁다가 한숨도 못 자고 쾡한 눈으로 새벽 기차를 타러 도망치듯 나왔다.

이틀후, 암리차르에서 다시 델리로 돌아와 처음 인도여행을 같이 시작했던 일행들과 약속장소에서 무사히 만났다. 이들은 그 사이 북쪽지방인 레에 갔다왔다. 히말라야 산자락이라 긴팔을 입고 다닐 정도로 쌀쌀했다며 델리의 더위를 새삼 탓한다.

에어컨이 달린 호사스러운 게스트하우스
여행 막바지라 호사를 좀 부리겠다고 에어콘이 나오는 중급 호텔에서 묵었다. 앞이 탁 트여서 햇살이 고스란히 다 들어온다. 지은지 얼마 안 되는 듯 모든 게 새것이다. 몇일 전의 음침한 게스트하우스와 비교해보면 천국같다.

이 중급호텔은 더블룸에 엑스트라베드까지 하룻밤에 800루피였고 싱글룸은 500루피 정도였다. 어두운 게스트하우스 하루 방값인 150루피에 비해서는 상당히 비싸지만 500루피래봤자 우리나라돈으로 1만원 정도다. 그런데 왠지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무조건 아껴야 할 것 같고 무조건 고생하면서 다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원한 중급 호텔에 누워서 생각했다. 인도에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세상엔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고, 살다보면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고.. 너무 좋은 모습만 보고 좋은 경험만 했으면 기억에 크게 남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 음침했던 게스트하우스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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