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인재 양성하지 않는 것은 죄악”…신경영 이끈 인사 철학

피용익 기자I 2020.10.25 12:53:25

혈연·지연·학연이 끼지 않는 공정한 인사 도입
여성 인재 양성에도 적극…각종 차별 없애

[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유능한 인재를 키워 삼성은 물론 한국 사회에 도움을 주겠다는 목표를 갖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생전에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1993년 선언한 신경영의 중심에도 인재 양성이 있었다.

신경영의 변화는 혈연·지연·학연이 끼지 않는 공정한 인사의 전통을 조직에 뿌리 내리고, 연공서열이나 각종 차별조항을 철폐해 시대 변화에 맞는 능력주의 인사가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삼성은 1993년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부터 전형 방법을 전격적으로 변경했다. 필기시험에서 전공시험을 폐지하고 전산 기초지식과 상식, 영어 듣기 시험을 도입했고, 1994년 6월에는 가점주의 인사고과, 인사규정 단순화, 인간미·도덕성 중시 채용, 관계사 간 교환근무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1995년 7월에는 채용 때 학력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포함한 ‘열린 인사’ 개혁조치를 발표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열린 인사는 기회균등 인사, 능력주의 인사, 가능성을 열어주는 인사 등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기회균등 인사는 학력이나 성별을 이유로 기회조차 주지 않던 닫힌 제도와 관행을 모두 철폐하고, 능력과 의욕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열어주는 것이다. ‘대졸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명칭을 ‘3급 신입사원 채용’으로 바꾸고, 학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게 했다.

능력주의 인사는 급여 인상이나 승진·승격 때 본인 스스로 일구어 낸 능력과 업적에 따라 대우받게 하는 것이다. 1년 간의 고과 결과에 따라 개인별로 급여가 차별화되고, 능력만큼 보상받는 능력급제를 단계적으로 모든 계열사에 실시했다. 승격도 연공서열의 관행에서 벗어나, 직급별로 요구되는 자격요건을 정해 놓고 이에 해당하는 점수를 획득하게 되면 기간에 관계없이 승격이 가능하도록 하는 승격 자율관리 제도를 도입했다.

가능성을 열어주는 인사는 고졸, 현장직 사원도 장기적인 가능성과 비전을 갖고 부족한 능력을 보충할 수 있도록 제도와 여건을 확충했다. 사내대학을 설립하고 조기출퇴근제를 활용하여 야간 대학에 진학할 경우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며, 양질의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보내는 것은 경영의 큰 손실이다.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것이 바로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국제화, 전문화, 다양화 시대에서는 한 가지 전문분야에만 정통한 ‘I자형’ 인재가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갖춘 ‘T자형’ 인재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는 기술자도 MBA가 되어야 하고, 관리부서 출신도 컴퓨터와 친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1990년부터 지역전문가제를 운영하여 2012년까지 4400여 명을 세계 각국에 파견했다. 1994년에는 제조 부문의 과·차장급 간부를 대상으로 테크노 MBA 과정을 도입하고, 1995년에는 경영지원 부문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소시오 MBA 과정을 도입했다.

21세기 CEO 과정과 21세기 리더 과정은 국제경영 및 전략경영 능력을 갖추고 신경영 철학의 전파와 실천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임원과 부장을 대상으로 운영됐다. 6개월의 장기 과정을 통해 신경영 철학, 경영학, 외국어, 해외 유명 경영대학원 연수, 선진기업 인턴십, 전략과제 연구 등을 단계적으로 이수하여 종합적인 경영능력을 육성했다.

여성 인재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평소 우리 사회와 기업이 여성이 지닌 잠재력을 잘 활용한다면 훨씬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여성인력의 활용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남녀차별 관행을 모두 걷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삼성은 인사개혁을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주지 않았던 차별적 관행을 타파하고, 우수한 여성인력을 육성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 위해 각종 방안을 마련했다.

삼성은 1992년 4월 여성전문직제를 도입하고 1차로 비서전문직 50명을 공개채용해 전문지식과 우수한 자질을 보유한 여성인력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에도 소프트웨어직군에서 100명의 우수 여성인력을 공채하는 등 여성 전문직제를 확대했다.

신경영 이후에는 1993년 하반기 대졸사원 공채에서 여성 전문인력 500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여성인력 채용을 본격화했다. 특히 1995년 7월, 열린 인사 개혁을 계기로 그 동안 여사원이 제한 받아왔던 각종 기회를 보장하고 활동영역을 크게 넓혔다.

1995년엔 최초로 여성 지역전문가 5명을 선발해 파견한 후 더욱 확대해 나갔고, 외국어 생활관이나 해외 어학연수 등 장단기 어학연수 기회도 여성에게 똑같이 보장했다. 1995년 상반기부터는 여성 해외 주재원을 파견하고, 사내강사나 신입사원 교육의 지도선배로 활용하는 등 활동영역을 확대했다.

삼성은 사무직 여사원들에게 적용해 오던 근무복 제도를 1995년 3월부터 폐지하고 자율에 맡겨, 각자 개성을 살린 복장을 할 수 있게 했다. 이건희 회장은 기혼 여성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직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서울과 전국 주요 사업장에 기혼 여성을 위한 어린이집을 설치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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