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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30대 직장인 A씨는 얼마 전 직장 상사였던 대기업 임원 B씨의 부탁을 받고 B씨 딸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받다가 깜짝 놀랐다. 대기업과 거래를 트려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축의금으로 1000만원, 2000만원씩을 5만원권으로 빳빳하게 준비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명절 때 부모님 용돈 드릴 때나 가끔 보던 5만원권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놀라운 마음이 들었다.
70대 C씨는 최근 만기 도래한 은행 적금을 딸에게 계좌 이체하려고 했으나 과세당국이 증여세로 추적할 수 있다는 주변 만류에 현금으로 뽑아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막상 은행에 가서 수 천 만원을 한꺼번에 찾으려고 보니 특정금융정보법에 따라 해당 거래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될 수 있다는 사실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FIU에 보고되면 이 정보는 과세당국에 들어갈 수 있다. FIU에 통보되는 찜찜함에 시간을 두고 매일 조금씩 현금인출기(ATM)에서 돈을 찾아 딸에게 줘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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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低)금리에 코로나19 확산까지 겹치면서 5만원권이 가계 금고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CBDC)를 발행하는 등 디지털 경제가 고도화할 경우 과세당국의 추적이 쉬워져 5만원권은 음지로 더 숨어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5만원권 환수율(발행액대비 환수액 비율)은 18.4%로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됐던 2009년을 제외하곤 역대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코로나19가 발생했던 작년 24.2%에 비해 5.8%포인트 더 떨어졌다. 환수율 100%를 넘었던 1만원권도 작년 74.8%로 떨어졌으나 올해는 다시 97.1%로 회복했는데 5만원권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셈.
한은이 CBDC를 발행하든 하지 않든 디지털 경제가 가속화되고 있는 만큼 5만원권은 가정 내로 더 숨어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CBDC 발행 과정에서 사생활 보호를 강화한다고 해도 특정인의 CBDC 보유 정보를 과세당국이 얼마든지 취득할 수 있다. 디지털 화폐가 지급 수단으로 전면에 깔리면서 현금을 사용하려는 수요는 줄어 들겠지만 뇌물이든, 탈세를 위한 목적이든 현금을 쌓아 두려는 수요는 줄어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한은이 2019년에 실시한 지급수단 및 모바일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결과 지갑 속 평균 현금은 5만3000원에 불과했고 현금 이용 비중은 금액 기준으로 17.4%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이후엔 더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5만원권은 작년과 올해 합쳐 44조8000억원을 발행했는데, 환수된 돈은 10조원이 채 되지 않는다. 10월 말 5만원권 28억1500만장이 발행돼 있고 인구 수로 나눠보면 인당 54장의 5만원권을 품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 경제가 고도화될수록 5만원권의 사용 수요는 감소하고 보유 수요만 높아질 텐데 한은이 무조건적으로 수요에 맞춰 5만원권을 찍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가에 대해 의문이 커질 수 있다.
이윤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5만원권은 유통도 안 되고 환수도 안 되는 상황인데 디지털화가 진전되면 이런 부분이 심해질 것이고, 이것을 그냥 놔둬야 할지 의문”이라며 “CBDC를 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투명성을 높이는 것인데 CBDC 도입을 논의할 때 보유하고 있는 현금 일부를 의무적으로 디지털 화폐로 전환한다든지 장기적 관점에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