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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만난 사람들)한국 사랑하는 `벽안의 LG맨`

하정민 기자I 2005.10.20 11:24:59
[뉴욕=이데일리 하정민특파원] 미국에 온 첫 날. 휴대폰을 사기 위해 한 이동통신회사의 대리점을 방문했다. 매니저는 "우리 회사 고객이 되면 한국 모 전자업체의 휴대폰을 공짜로 준다"며 가입을 적극 권유했다.

"왜 한국 제품이냐"고 묻자 "고객들이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휴대폰으로 고객들을 유혹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동통신회사들이 많지만 통화 품질이나 전화요금 체계 산정은 비슷하므로 결국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국 휴대폰이라는 `당근`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삼성과 LG 등 한국 전자업체들이 첨단 기술과 혁신적 디자인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는 소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서 그 인기를 실감하고 보니 새삼 느낌이 남달랐다. 한국 업체들의 위상이 실제로 어느 정도 변했는지, 미국 소비자들의 실제 평가는 어떤지 등등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바로 LG전자 북미 법인의 북동부 지역(뉴욕과 워싱턴) 판매 총 책임자인 스캇 번즈(50 왼쪽 사진)다. 그는 디지털 TV, 디지털 레코더를 비롯한 DDM(디지털 디스플레이 미디어) 분야의 주요 제품군 판매를 관장하고 있다.

일본 미쓰비시 전기에서 일하다가 2년 전 LG로 스카웃된 번즈는 "불과 2년 사이에 한국 업체들의 위상과 인지도가 몰라보게 높아졌다"며 "한국 기업들의 우수한 기술력과 고가 소비자를 겨냥한 프리미엄 마케팅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2년 전 처음 LG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소비자들의 LG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며 "휴대폰의 경우 젊은이들이 LG 휴대폰을 많이 사용해 다른 제품에 비해 인지도가 높았지만 기타 전자제품에 대한 인지도는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번즈는 LG를 비롯한 한국 업체들이 휴대폰, 디지털 TV 등 트렌디한 전자제품에 집중한 것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의 경우 소비자들이 일종의 가구처럼 인식하고 있어 아주 낡고 망가지기 전에는 교체하지 않는 반면, 휴대폰이나 디지털 TV는 있어도 또 사고, 싫증나면 바꾸는 제품이란 인식이 강하다"며 "한국 업체들의 기술 진보가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검증받을 기회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업체 트렌디 제품 승부수 먹혔다"

특히 휴대폰에서의 성공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번즈는 "휴대폰의 선전은 LG 브랜드나 기타 전자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며 "휴대폰은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라고 말했다. TV, 냉장고, 세탁기 등은 아무리 LG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도 그 집에 가보기 전에는 LG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을 모르지만 휴대폰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LG를 비롯한 한국 업체들의 브랜드 인지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일본 업체와 비교했을 때 일반 소비자의 브랜드 인지도는 어느 정도냐고 묻자 한 가지 예를 들었다.

그는 프로모션 기간에 LG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고객들이 저절로 다가와 "나 당신네 TV 가지고 있소" 라고 말을 건넨다고 전했다. 반면 소니의 경우 어떤 고객도 소니 직원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건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소니의 경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고객들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을 이유가 없지만, 한국 업체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브랜드` 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고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는 것.

번즈는 "아직까지 미국 소비자들이 한국 전자업체의 이름을 들었을 때 소니나 도요타처럼 직관적으로 어떤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저 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지만 기술력이 우수하고 고급스럽고 무엇인가 신비하다`는 느낌은 확실히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GE 등 미국 업체들이 백 년 넘게 가전제품을 판매해 왔고 일본 업체들도 미국 시장에 진입한 지 수 십년이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업체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매우 훌륭한 성과라고 칭찬했다. 한국 업체들이 계속 선전한다면 조만간 강력한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를 구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LG를 비롯한 한국 업체들이 경쟁회사보다 높은 가격에 제품을 파는데도 잘 팔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기술력" 이라고 답했다. 그는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고가 프리미엄 마케팅을 펼칠 수가 없다"며 한국 제품이 베스트바이, 서킷시티, 홈디포 등 미국 주요 유통업체들의 endcap display(매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냐고 반문했다.

번즈는 일본 업체와 달리 LG의 경우 미국 유통업체의 판매 책임자들에게 일종의 커미션도 거의 주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홈디포 등 유통업체 판매 책임자들은 소비자와 가장 지근거리에서 대면하기 때문에, 이들의 추천이 고객들의 제품 선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는 "소니나 파나소닉의 경우 50인치 PDP-TV를 한 대 판매하면 유통업체 매니저에게 최고 150달러 정도의 커미션을 지불하는 것으로 안다"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유통업체에게 추가 이득을 부여하지 않고도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원동력이 결국 품질이라는 설명이다.

저가 시장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 전자업체에 대한 느낌을 묻자 "아직은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답했다. 번즈는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한국 업체들과 가격으로 승부하는 중국 업체들 사이의 간극은 아직 상당하다"며 "중국 업체들은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폐기시킨 공장을 매입해 여기서 제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세상에 수많은 자동차업체가 있어도 벤츠는 결국 벤츠"라며 "품질이 뒷받침된다면 중국 업체들의 도전은 큰 위협이 못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번즈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에 대해 항상 긴장하는 것은 매우 좋은 자세"라며 "한국 전자업체들이 현재와 같은 성공을 이룬 데에는 일본 업체들의 자만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본 기업들은 한국 기업을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한국 업체가 TV를 만들어?` 라는 안이한 인식을 지닌 곳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브랜드는 알아도 한국기업 아는 사람은 드물어

한국 업체들의 과제를 묻자 "LG의 성공과 한국의 성공은 다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LG가 한국 브랜드인지를 아는 미국 소비자는 극소중의 극소수"라고 말했다.

북핵과 같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 때문에 한국 업체들이 아직까지는 일부러 한국 브랜드임을 드러내지 않는 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주식회사 한국`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지도가 전무하다는 것.

앞으로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둔 마케팅 활동을 펼치겠느냐고 묻자 "여성, 특히 주부 고객을 공략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그는 "나 자신도 거실에 PDP TV를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아내와 의견을 달리했지만 아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며 "전자제품, 특히 가전제품의 경우 주부의 선택이 절대적이므로 이들을 어떻게 파고드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의 문화 차이에 대해 묻자 한국의 기업 문화가 훨씬 자신의 성향이나 기질과 맞는다고 대답했다. 번즈는 "일본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하고 관용적이지만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다"며 "회사에서 내가 항상 일종의 벽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 기업의 경우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놀 때는 열심히 노는 특유의 화끈한 국민성이 마음에 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서부터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술을 마시게 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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