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트코인은 아직 실질적인 포스트양자 대응에 사용할 서명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커스터디 업체들은 시스템을 전면 재구축할 때 기준으로 삼을 단일 기술표준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린델 수석 암호학자는 각 블록체인 커뮤니티가 하나의 공통 서명 방식을 채택하기보다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코인베이스는 특정 후보 하나에 맞춰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다 여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린델은 블록체인이 특정 서명 방식을 승인했는데 코인베이스의 커스터디 인프라가 이를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현재 미국 내에 상장돼 있는 비트코인·이더리움 현물 상장지수펀드(ETF)가 보유한 가상자산의 80% 이상을 코인베이스가 수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코인베이스의 고객에는 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도 포함돼 있으며, 블랙록은 자사 투자상품과 연계된 디지털자산에 코인베이스 커스터디를 이용하고 있다.
커스터디 시스템은 거래 승인을 위해 필요한 프라이빗키를 보호한다. 따라서 향후 비트코인의 서명 방식이 변경될 경우 대형 커스터디 업체들은 키를 생성하고, 보관하고, 사용하는 기술 역시 업데이트해야 한다.
많은 기관용 커스터디 플랫폼은 다자간 연산(Multi-Party Computation·MPC) 을 이용해 프라이빗키에 대한 통제권을 여러 참여자에게 분산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거래 승인 과정에서 어느 한 참여자도 전체 프라이빗키를 보유하거나 완성된 형태로 조합할 필요가 없다.
린델은 많은 포스트양자 서명 방식이 현재 주요 블록체인이 사용하는 서명 방식과 수학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MPC와 친화적이지 않을 수 있다” 고 말했다. 특히 해시 기반 서명은 기존 암호학적 키 분할이 의존하는 산술 구조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탠퍼드대 암호학자 댄 보네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이 같은 서명 방식에도 MPC와 유사한 통제 구조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린델은 설명했다. 다만 관련 연구는 아직 매우 실험적인 단계이며, 해시 기반 서명에 실용적인 MPC 대체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코인베이스의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이번 커스터디 설계 이전부터 이어져왔다. 코인베이스는 지난 1월 독립적인 양자컴퓨팅·블록체인 자문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에는 보네와 린델 외에도 이더리움재단 연구원 저스틴 드레이크, 텍사스대 교수 스콧 애런슨, 아이겐레이어 창업자 스리람 칸난, 분산시스템 전문가 달리아 말키 등이 참여하고 있다.
코인베이스에 따르면 포스트양자 로드맵에는 비트코인 주소 처리 방식 변경, 내부 키 관리 시스템 업데이트, MPC 인프라 안에서 ML-DSA 같은 서명 방식을 지원하기 위한 연구 등이 포함돼 있다. 코인베이스는 자문위원회에 양자컴퓨팅 발전 상황을 평가하고, 권고안을 발표하며, 주요 기술 진전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겼다.
코인베이스는 MPC 호환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프로그래머블 하드웨어 보안모듈(Hardware Security Module·HSM) 을 기반으로 한 백업 설계를 검토하고 있다고 린델은 밝혔다. HSM은 암호학적 정보를 저장하고 민감한 연산을 수행하는 물리적으로 보호된 장치다.
코인베이스가 검토 중인 구조에서는 프라이빗키가 포스트양자 암호기술을 이용해 암호화된 상태로 유지되고, 실제 완전한 키 형태로 조합되는 것은 보안 HSM 내부에서만 이뤄진다. 전체 키를 보호된 장치 내부에만 존재하게 하면, 기존 MPC 방식으로 분할할 수 없는 서명 방식도 커스터디 업체가 지원할 수 있다. 또 프로그래머블 모듈을 사용하면 블록체인 개발자들이 새로운 표준을 결정한 이후 코인베이스가 해당 방식을 추가로 지원할 여지도 커진다.
린델은 완성 시점은 제시하지 않았다. 기술 개발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시스템이 완성되면 각 네트워크가 어떤 포스트양자 서명 방식을 선택할지 미리 예측하지 않아도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제안된 구조에서는 전체 키가 일시적으로 HSM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물리적 보안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따라서 코인베이스는 외부 소프트웨어나 운영자가 키에 접근하지 못한 상태에서 HSM이 서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코인베이스가 MPC와 호환되는 서명 방식에서도 MPC를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HSM 아키텍처는 특정 네트워크가 선택한 암호방식이 분산 키 생성이나 분산 서명과 호환되지 않을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커스터디 방식이 된다.
현재 비트코인은 타원곡선암호(ECC)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시연된 양자컴퓨터 가운데 노출된 공개키로부터 비트코인의 프라이빗키를 역산할 수 있는 수준의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연구자들과 업계 단체들은 비트코인의 보안 모델을 바꾸려면 소프트웨어 개발, 테스트, 지갑 업그레이드, 네트워크 합의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조기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코인베이스 자문위원회는 지난 6월 비트코인 개발자들에게 암호학적으로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양자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에 마이그레이션 도구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위원회는 약 170만BTC가 공개키가 노출된 오래된 Pay-to-Public-Key 주소에 보관돼 있으며, 주소 재사용까지 고려하면 향후 위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비트코인이 최대 500만BTC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다만 자문위원회는 취약한 코인을 동결하거나 소각하거나, 향후 공격자가 가져갈 수 있도록 그대로 두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대신 마이그레이션 기한이 지난 뒤에도 오래된 주소 형식에 남아 있는 코인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비트코인 커뮤니티가 합의 절차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