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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대선 이후 정치지형은 간단합니다. 집권여당의 초강세와 야당의 지리멸렬입니다. 민주당은 꿈의 지지율 50% 안팎을 기록 중입니다. 내년 지방선거 전망도 아주 밝습니다. 야당의 처지는 정반대입니다.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가릴 것 없이 암울 그 자체입니다. 당 지지율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민주당 46%, 자유한국당 14%, 바른정당 7%, 국민의당 6%, 정의당 5%(한국갤럽 11월 3주차). 야당 지지율을 모두 더해도 민주당의 3분의 2 수준입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생존은 불투명합니다. 지난해 4월 20대 총선 당시와 비교해보면 더욱 극명합니다. ‘유승민 공천배제 파동’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새누리당은 지지율 1위였습니다. 국민의당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국갤럽이 총선 이틀 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새누리당 37%, 민주당 20%, 국민의당 17%, 정의당 7%로 나타났습니다.
정당 지지율의 상전벽해는 왜일까요? 대선 과정에서도 야당은 이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국민의당 대표 안철수는 한때 ‘문재인 대세론’을 위협했습니다. 보수야당도 반기문 카드를 내세워 ‘문재인 vs 안철수’ 분열구도에서 기적적인 대선승리를 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선 이후 모든 게 물거품이 됐습니다. 명암을 가른 건 ‘문재인’이라는 변수입니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는 첫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사실 민주당의 행복은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야당이 너무 못해서 생겨난 반사이익 때문입니다. 과거 열린우리당의 단독 과반이나 한나라당의 재보선 불패신화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야당의 불행은 이유가 제각각입니다.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등 대선후보가 전면에 등장한 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모두 핑계가 넘쳐납니다. 야당이 선택한 최후의 카드는 이른바 ‘통합’와 ‘연대’입니다. 일단 틀린 선택은 아닌 듯합니다.
◇역대 선거의 필승 공식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저작권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입니다. 1945년 10월 해방 이후 혼란기 미국에서 귀국했던 이승만의 첫 육성 메시지였습니다. 해방 이후 좌우익 분열상을 딛고 국민이 단합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정치적 공과를 떠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특히 대한민국 정치판만큼 꼭 들어맞는 곳도 없습니다. 87년 대선 이후 정치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언제나 뭉치는 쪽이 승리했습니다. 분열은 당연히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1노3김 구도로 치러진 87년 대선은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어부지리 승리를 거뒀습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은 보수성향의 정주영 출마에도 승리를 거뒀습니다. 반면 김대중은 대선 패배 이후 눈물의 정계은퇴를 해야 했습니다. 97년 대선은 보수의 흑역사입니다. 이회창·이인제의 분열로 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정권을 헌납했습니다. IMF 외환위기라는 단군 이래 최대 국난에도 불구하고 다잡았던 대선 승리를 놓쳤습니다. 2002년 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파였던 노무현은 대선 전날 지지철회가 있긴 했지만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통해 대통령 권력을 예약했던 이회창을 극적으로 눌렀습니다.
2007년 대선은 보수통합의 상징적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인제 독자출마의 악몽을 경험했던 보수진영은 교훈을 얻습니다. 이명박에 반발한 이회창의 독자출마가 있었지만 박근혜는 경선 승복을 선언했습니다. 이명박은 압승을 거뒀습니다. 반면 진보진영은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창조한국당(문국현), 민주노동당(권영길), 민주당(이인제)으로 갈가리 찢긴 상태로 나섰습니다.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2012년 대선도 비슷한 구도였습니다. 87년 체제 이후 최초로 ‘박근혜 vs 문재인’라는 보수진보의 일대일 구도였지만 승리는 박근혜의 몫이었습니다. 박근혜는 2007년 대선 이후 사실상 보수단일후보를 예약한 절대 강자였습니다. 문재인은 안철수와의 불안전한 단일화에 따른 분열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5.9 대선은 예외적입니다. 2012년 대선과 달리 보수, 진보 모두 분열된 채 선거에 나섰습니다. 승자는 문재인이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영남 기반의 보수정당에 맞서 진보가 분열하고도 승리를 거뒀다는 점입니다.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 탄핵에 이은 새누리당 분당과 반기문 불출마 때문입니다. 보수분열의 후폭풍이 더 컸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수·진보의 이합집산은 선거승패를 좌우해왔습니다. 내년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각자의 방식으로 통합 또는 연대를 거론하는 것은 내년 지방선거 전망이 너무나도 암담하기 때문입니다.
◇설왕설래 통합·연대 논의? 민주+국민, 보수통합, 국민+바른
내년 지방선거와 관련해 설왕설래가 오가는 통합과 연대의 흐름은 크게 3가지입니다. △민주당+국민의당 △자유한국당+바른정당 △국민의당+바른정당. 명분은 모두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화까지는 첩첩산중입니다. 촛불국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인위적인 정계개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합치자는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통합은 득보다 실이 큽니다. 통합정당이 국회 과반을 점할 수 있다는 장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당 당원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엄청난 파열음이 불가피합니다. 더구나 안철수 대표가 동의할 리도 만무합니다.
‘단일보수’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기에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지난 대선에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대선과정에서 홍준표와 유승민의 거친 설전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살인자는 용서해도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과 “성폭력 공모 범죄자를 대통령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이 한 배를 탈 수 있을까요? 이게 가능하려면 두 사람이 본인의 말을 철회하고 서로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불가능합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진보라는 이념대립과 영호남 지역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한국정치의 특성에서 제3세력의 독자생존론은 불가능합니다. 충청을 기반으로 했던 자민련 총재 김종필의 정치실험이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린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영호남 지역주의 극복과 여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견제할 제3당의 탄생이라는 명분도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호남과 영남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정책적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민주당, 한국당을 제쳐두고 양당이 통합에 나서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깊고 깊은 분열의 후유증…민주당 계열 정당의 흑역사
분열은 쉽고 통합은 어렵습니다. 2000년대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이 보여준 이합집산 과정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을 제외해도 민주당 계열 정당의 분열은 일상이었습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교체론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노무현 대통령 탄핵 등 3대 앙금이 풀리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특히 참여정부 당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논란은 이러한 3대 변수의 갈등 고리를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결국 2007년 대선 대참패와 2012년 대선 석패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비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잉태된 것입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의 지속적인 분열은 거칠게 이야기하면 YS의 3당합당에 반발해 DJ를 선택했던 영남 기반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진보진영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호남 민주화운동 세력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거 국면에서는 ‘야권통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승리의 전망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통합을 달성한다 해도 당 내부의 심리적 분당 상태는 여전했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한지붕에서 동거했던 새정치민주연합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서로가 적군보다는 아군을 향한 내부총질에 치중했습니다.
◇보수의 전략적 분열구도를 무너뜨린 반기문의 불출마
민주당 계열 정당과 달리 보수야당의 전신인 새누리당과 한나라당은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차떼기 논란, 탄핵역풍, 2007년 대선경선, 세종시 수정안 갈등, 20대 총선 공천파동 등 10여년 동안 극심한 갈등을 겪었지만 단일정당 체제였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국회의원 선거구마다 1명의 당선자만을 뽑는 소선거구제의 위력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호남보다 국회의원 숫자가 두 배 많은 영남의 존재 탓에 보수는 늘 손쉬운 승리를 거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19대 총선입니다. MB정부의 레임덕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영남 압승을 발판으로 과반을 달성했습니다. 20대 총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승민 찍어내기’라는 최악의 공천파동에도 새누리당은 무려 122석에 무소속 탈당파까지 포함하면 129석을 얻었습니다. 원동력은 소선거구제에 기반을 둔 영남 압승이었습니다.
분단, 전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보수는 곧 대한민국의 주류였습니다. 현재처럼 만신창이가 된 적은 없습니다. 한국당과 바른정당의 분열은 ‘반기문 불출마’ 효과 때문입니다. 보수는 19대 대선에서 ‘원칙있는 패배’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10년 집권의 피로감과 국정농단 사태의 여파로 대선승리는 애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문재인 vs 안철수 분열구도에 반기문 선전이라는 시나리오로 기적적인 대선승리를 노렸습니다. 바른정당의 창당 역시 반기문을 위한 ‘둥지’였습니다. 그러나 반기문이 허무하게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후 과정은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대선승리보다는 대선 이후 보수의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유증은 너무나도 깊습니다. A의원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른바 최순실청문회에서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A의원은 대통령 탄핵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 바른정당에 몸을 담습니다. 대선 직전에는 다시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을 선언했다가 쇄도하는 비난 여론에 주저앉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친박세력들이 보수대개혁에 대한 폄훼 발언이 나오는걸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고 생각한다. 바른정당의 창당 가치를 끝까지 지키는 게 옳다” 그러나 A의원은 11월초 탈당계를 제출하고 다시 한국당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치가 코미디의 밥줄을 끊은 상황입니다.
◇반성과 성찰없는 기계적인 통합, 과연 시너지가 있을까?
지난 대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낮은 지지율에도 대선완주를 고집한 유승민에 반발한 바른정당은 긴급의총을 통해 자유한국당·국민의당에 3자후보 단일화를 제안했습니다. 이른바 3자 반문연대입니다. 문재인 대세론으로 흐른 대선판을 뒤흔들 가장 강력한 카드였지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문재인이 선수를 쳤기 때문입니다. 대선을 불과 보름 정도 남겨둔 4월 25일 TV토론에서였습니다. 문재인은 유승민, 안철수, 홍준표에게 3자 후보 단일화 의사를 물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반(反)문재인’ 빼고는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와 비교할 때 지금은 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언젠가는 대통령의 지지율도 떨어지고 경제와 안보도 위기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으니 통합만 하면 열매가 떨어질까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통합’을 꿈꾸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셨는지요? 영화 상에서 최민식이 하정우에게 나이트클럽 인수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하정우가 유명한 대사를 남깁니다. “대부님,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조폭도 명분을 따집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물론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명분이 필요합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난해 이맘때쯤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고 외친 국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