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취업 진풍경.."스펙을 숨겨라"

[이데일리 오상용기자] 토익 990점. 2년간 미국 어학연수. 6개월간 S기업 인턴사원근무. 한자 검증시험 1급 자격증. C지역 고아원 7년간 봉사활동……. 좁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한국 청춘남녀들의 `스펙(specification : 학력이나 토익점수 경력 등을 합한 일종의 취업자 명세서)쌓기`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불황의 한 복판을 지나는, 바다 건너 미국의 고용사정도 녹록치 않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한국의 취업준비생과 달리 미국의 취업준비자들은 요즘 스펙 숨기기에 여념이 없다. 눈높이를 낮춰 일자리를 구하려는 이들에게는 화려한 경력과 높은 학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2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100통의 이력서를 돌리고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크리스틴 코노프카(29.여)는 최근에야 비로소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력서상에 석사학위와 강사 경력을 지워버린 후였다. 코노프카는 "고용주들은 필요한 일자리에 걸맞지 않게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를 채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비교적 빨리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불경기로 일자리가 줄면서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들이 그저그런 일자리에 응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경기가 조금만 나아져도 더 좋은 일자리로 옮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고용주나 회사 인사담당자로서는 채용을 꺼리기 마련.

밀워키 노동청의 IT 고용지원담당자 자메이카 에일베스는 "단순직 등의 일자리에 우수한 인재들이 지원하는게 불편스럽다"고 말했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배를 갈아탈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런 에일베스도 요즘 나타나고 있는 기이한 변화에 당혹해 하고 있다. 석사나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학력이나 경력을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고 취업지원서를 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49세의 레노라 카플란도 여기에 속한다. 26년간 라스베가스의 마케팅회사에서 PR담당 부사장을 지냈던 그녀는 실직후 일자리를 구했지만 번번이 헛물을 켰다. 그녀의 높은 경력이 일자리를 구하는데 걸림돌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이력서상의 몇몇 경력을 지워버려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취업알선 회사들이 취업준비자들에게 경력을 낮춰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있다. 일자리를 구하던 29살의 브리짓 리도 취업알선업체의 이같은 요구에 원하는 직군을 매니저와 리서치 프리랜서에서 사무보조나 스태프로 낮춰 제출했다.
 
그러나 이력서를 낮춰 쓰는 것이 반드시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브리짓 리는 최근 회계 매니저로 임시직을 얻었지만 향후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스펙을 숨긴 이력서가 아닌 원래 자신의 경력 그대로를 담은 이력서로 채용됐다.
 
그녀는 "단기직을 구하려면 이력서를 낮춰쓰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경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