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문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서는 연일 거침없이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지난 2일 일본이 각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강행했을 때는 “이기적인 민폐 행위”라는 표현을 썼다. 두 눈과 귀를 의심했을 정도로 전례 없이 강한 발언이었다.
심지어 이 발언은 방송으로 생중계가 됐다. 문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두발언이 생중계된 것은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사실상 대국민 담화 성격의 강력한 대응으로 그 만큼 청와대는 이번 사태를 엄중하게 보고 있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이번 조치는 위협적이었다. 총성만 울리지 않았지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 경제적 힘의 논리를 내세워 한국을 굴복시키겠다는 의도다. 문 대통령이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데는 일본의 이번 조치에 대한 항전 의지가 담겼다.
아베 정권의 이번 조치가 선전포고에 준하는 것은 역사 문제를 놓고 양측이 벌이던 ‘외교전쟁’이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를 연계해 일으킨 ‘경제전쟁’이라는 점에서다. 지난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적극적 대응을 천명하면서 “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의 시비는 이를 넘어섰다. 확전이다.
|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의 발언에서는 더 강경한 반일감정도 보인다. 그는 “일본은 우리의 평화 프로세스 구축 과정에서 도움보다는 장애를 조성했다”고 질타했다. 남북 대화국면의 단초를 제공했던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한미 연합훈련 연기를 반대했고 남북 및 북미 대화 과정에서도 제재·압박을 주장하면서 재를 뿌렸다.
비단 이번 뿐이 아니다. 지난 2005년 6자회담의 주역 중 하나였던 일본은 애당초 남북 관계 복원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한 외교부 인사는 “일본은 중요한 순간마다 북한 납북자 문제를 꺼내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회상했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문제 해결 과정에서 주요 당사자를 남북→남북미 등으로 간소화한 배경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그간 여러차례 극일 방안으로 분단 체제의 극복을 강조했다. 경제전쟁 대처 방안으로 지난 5일 “남북 간 경제 협력으로 평화 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고 201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남북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자유롭게 오가며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광복”이라고 했다.
역사 문제로는 척을 지고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문제에서도 협조적이지 않았던 일본이 경제전쟁까지 일으켰다. 미운 놈이 도리질하는 형국이다. 문 대통령이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소리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아베 정권에 대한 분노마저 읽힌다.
한일 경제전쟁은 개전은 했지만 휴전도, 종전도 없을 전망이다. 아니, 정치적 지도자에게는 경제전쟁을 마무리지을 권력이 주어지지 못했다. 시장은 늘 정부의 예상을 넘어서 움직였다. 당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본산 부품 소재에서 탈피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
2005년 노 전 대통령이 한일 FTA를 포기한 것은 김 차장이 당시 작성했던 보고서의 영향이 컸다. 김 차장은 저서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에서 “부품 소재 분야는 특히 불안했다. 일본은 전 세계 부품 소재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도 일본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며 “일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제2의 한일합방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썼다. 그리고 14년 만에 김 차장은 부품 소재를 선봉에 내세운 일본의 선전포고에 기다렸다는 듯 호응했다.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1965년 당시 일본 당국자는 한일 간에 수직 분업체제를 만들고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은 그 후에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고 추월할 수 있었다”라며 “일본 당국자들 관점에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아베의 일본은 바로 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부 분야를 넘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한국과 이를 막으려는 일본의 동북아 패권 다툼이 서막을 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