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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재벌의 진화

송길호 기자I 2015.08.18 09:05:10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부장] 규제의 목적은 피규제자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되는 책임있는 행동을 유도할때 의미가 있다. 하지만 위기때 도입되는 규제는 과잉인 경우가 많다.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규제를 만들고 실패하면 또 다른 규제를 양산해내는 악순환의 고리, 바로 규제의 블랙홀이다.

‘롯데사태’는 재벌체제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극소수 지분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이용해 그룹 전체를 통제하는 총수의 전횡, 불투명한 지배구조에 의한 후진적 승계방식과 경영권 분쟁,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비방과 퇴행적 행태…. 황제경영의 전근대성· 재벌체제 부조리의 집대성이다. 3주간에 걸쳐 진행된 롯데시네마의 저질드라마, 공분을 일으키며 재벌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1960년대말 스웨덴 스톡홀롬.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발렌베리 본사 앞은 연일 시위대의 물결로 넘쳐났다. 기득세력에 대한 저항을 모토로 내건 급진 학생운동(68혁명)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발렌베리 가문도 집중공격을 받은 거다. 지금이야 바람직한 재벌의 모델로 평가받지만 당시만 해도 발렌베리 가문은 정경유착· 경제력 집중· 세습경영, 이른바 시대 착오적인 기득권 세력의 상징으로 내몰렸던 셈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대응은 정공법이었다. 스웨덴식 대타협, 경영권 세습을 인정받은 대신 기업 소유권을 사회에 돌려주며 책임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계열사의 정점에 있는 공익재단을 통해 사회공헌을 이어갔고 사치를 자제하며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가문의 원칙은 이때 확립됐다. 발렌베리의 진화는 결국 스스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결과다.

권위주의 시대 재벌 통제는 산업정책과 정책금융, 2가지 시스템을 통해 이뤄졌다. 정부가 직접 산업정책을 설계하고 부족한 자본을 배분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선 정치권력의 재량적 통제가 가능했다. 반면 민주화된 체제에선 원칙적으로 법과 제도에 기반을 둔다. 회계 투명성 제고· 사외이사제 도입· 소액주주권 강화 등 총수 전횡을 감시하는 메카니즘은 모두 외환위기 이후 10여년간 각종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재벌 규제장치다.

불행한 건 명시적 규제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피규제자들은 언제나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며 우회로를 찾는다. 가공자본을 통해 소유권과 의결권의 괴리를 가져오는 기형적 지배구조, 순환출자고리의 정점에 있는 불투명한 비상장사, 총수의 자의적 권한을 뒷받침하는 거수기 이사회, 탈법적인 경영승계…. 각종 규제장치의 도입에도 일부 재벌들은 통제의 법망을 벗어나는 각종 반칙과 변칙을 통해 여전히 전횡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무분별한 규제 강화만이 해법은 아닐 터이다. 안정적인 지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규 순환출자 뿐 아니라 기존 순환출자의 고리까지 끊는다면 계열사의 주력 기업은 경영권 위협은 물론 외국자본에 교란당할 수 있다. 규제의 본질은 끊임없는 자기증식이라고 할때 규제의 실패를 더욱 강력한 규제로 밀어붙이는 건 자칫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법과 제도적 장치만으로 재벌의 일신을 기대할 수 없다면 답은 자명하다. 위기를 기회로 돌파한 발렌베리 가문의 예처럼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지렛대로 재벌들이 자발적인 해법을 제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소유권은 특권이 아닌 책임’. 발렌베리 가문에 도도히 흐르는 자기성찰의 원칙처럼 재벌 스스로 진화할 일이다. 지금과 같은 정치 사회적 요구에도 기존 관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2의 롯데사태’는 양태만 달리 할뿐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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