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독립성 점검)⑦한은을 옭아매는 한은법

이학선 기자I 2010.03.15 11:00:10

논란의 핵 "정부 정책과의 조화" 조항
정책 결정 최종 권한은 대통령에 부여
금통위원, 형식적 추천에 임기도 짧아

[이데일리 이학선 기자] 현행 한국은행법은 통화정책의 중립성과 한은의 자주성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통화정책에 간여할 여지 또한 열어놓고 있어 때로는 '합법행위'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올해초 기획재정부의 열석발언권 행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11년만에 행사된 열석발언권은 한은의 독립성에 다시금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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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 외국계증권사는 투자자를 상대로 한 리포트에서 "(이성태 총재 임기가 만료된 뒤) 4월부터 통화정책은 사실상 청와대가 이끌어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 "정부정책과의 조화" 

열석발언권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인 1962년 한은법이 개정될 때 처음 도입됐다. 그 전까지 한은은 전시 인플레 수습 등의 책임을 맡아 금융정책 수립과 집행의 자율성을 보장받았으나, 정부 주도의 성장을 중시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능이 크게 약화됐다.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현 기획재정부)이 맡고, 재무부장관에게 재의요구권을 주는 동시에 재의요구 부결시 대통령이 최종결정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도 이 때다. 한은의 예결산 결정권한도 이때 정부에 넘어가 사실상 정부의 우산 아래 들어간다.

그로부터 35년뒤 통화정책의 목표를 물가안정으로 규정하고 금통위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도록 하는 등 한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한은법이 전면 개정됐다. 하지만 재의요구권과 열석발언권 조항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한은 관계자는 "정부가 다양한 협의채널이 있음에도 사문화된 열석발언권을 행사해 금통위에 참석한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면서 "이런 식으로 통화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국격`에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한은법은 한은의 중립성을 명시함과 동시에 정부정책과 조화를 규정하고 있다. 다만 `물가안정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라는 단서를 달아 정부와 협력이 물가안정과 상충될 경우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하고 있다.

김홍범 경상대 교수는 "중앙은행의 설립목적 자체가 단기적으로 경기확장의 유혹을 받기 쉬운 정부에서 벗어나 중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펴라는데 있는 것"이라며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정부정책과 조화라는 가치가 상충될 때 우선순위를 둔다면 당연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열석발언권이 법에 보장된 권리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정부가 금통위에 항상 참여하겠다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고 설득력이 없다"며 "잘하고 싶은 정부라면 중앙은행이 독립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두는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터져서는 안될 폭탄, 재의요구권

한번도 행사된 적이 없어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재의요구권도 한은에 부담을 주기는 마찬가지.

이성태 한은 총재는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의 재의요구권 행사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답변을 할 준비는 충분히 돼있지만, 민감한 상황이라 답을 드릴 수 없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금통위가 독립적인 정책변경(금리인상)에 나설 경우 정부로부터 열석발언 이상의 조치가 나올 가능성도 생각해봤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재의요구에도 불구하고 만약 금통위가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경우 최종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영국과 일본도 재의요구권과 비슷한 조항를 두고 있지만, 영국은 상하원의 승인을 얻도록 했고 일본은 정부에 의결연기권만 부여하고 있다. 금통위 결정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권한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 있는 한국과는 다르다.
 

재의요구는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한은법은 정부가 언제까지 재의를 요구할 수 있는지 등을 담고있지 않다.
 
따라서 금통위 결정을 보고 거래를 했는데, 뒤늦게 정부가 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면 이미 체결한 거래를 무효화할 수 없어 금융시장 자체가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사례가 한 번이라도 발생할 경우 경제주체들 사이에 더이상 한은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 한은의 존립근거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한은의 다른 관계자는 "그런 일(재의요구권)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며 "정부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접근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 짧은 임기, 외풍 가능성 높여

한은의 독립성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금통위원들의 임기다. 지난 1997년말 한은법 개정으로 임명직 금통위원들의 임기가 3년에서 4년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짧은 편이다. 미국 연준 이사의 임기는 14년, 유럽중앙은행은 8년, 프랑스는 6년, 일본은 5년이다. 한국보다 임기가 짧은 나라는 영국(3년) 정도에 불과하다.

금통위원들의 임기가 짧으면 통화정책이 그만큼 정치적 외풍에 휩싸일 가능성이 커진다. 한은법은 금통위원 임명시 추천기관의 추천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추천절차가 투명하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추천기관이 최종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기 때문에 추천은 요식행위에 가깝다.

다음달 임기가 끝나는 2명의 금통위원을 대신할 후임자가 누군지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금통위의 표결구도가 정부의 선택에 따라 한순간 바뀔 수 있어서다. 지금과 같은 짧은 임기로는 금통위원 교체기마다 통화정책의 독립성과 일관성을 걱정해야하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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