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마지막 순간 당신이 기억할 세상은?

경향닷컴 기자I 2009.05.22 12:40:00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경향닷컴 제공] 마지막 순간, 우리의 머리 속에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라는 영화가 상영 중입니다. 제목 앞에 생략된 말은 “30분 정도는 천국을 즐기시기를”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죽음을 알자마자 지옥으로 끌고간다는 뜻일까요.
 

중년 남녀의 거칠고 동물적인 정사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둘은 부부입니다. 쾌락은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사라지고, 부부는 곧 아름다웠던 지난날과 곤궁한 오늘을 얘기합니다. 회계법인의 중역인 이 남자 앤디는 회사의 돈을 빼돌렸다가 발각될 위기에 몰렸습니다.

앤디의 동생 행크 역시 사정은 좋지 않습니다. 이혼 후 딸의 양육비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앤디는 동생 행크를 꼬드겨 부모님이 운영하는 보석상점을 털자고 제의합니다. 부모님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보석을 털어나오자는 겁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피해액은 보험회사에서 보상할테니 모두가 이익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가게를 터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실수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됩니다.

연출을 맡은 시드니 루멧은 특히 배우들에게 사랑받는 감독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화는 배우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선 헨리 폰다, <허공에의 질주>에선 리버 피닉스를 빛냈습니다. <악마가…>에서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명연을 펼칩니다. 영화 속에서의 존재감이 워낙 육중해 그가 미소만 지어도 제 몸이 움찔하더군요.

영화는 현대 미국의 중산층 가족에 대한 암울한 전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중년의 회계사는 마약에 중독돼 있고, 그의 동생은 형수와 바람을 피웁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피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각자 살 길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어떤 위안, 사랑도 주지 못합니다.

차기작이 궁금해 루멧의 나이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92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태생. 무려 80대 중반입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긍정하고 여유로워지는 것 같은데, 루멧 영감님은 아닌가봅니다. 홀로코스트, 핵전쟁, 동성애, 부패 경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뤄온 그의 세계관은 그가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1950년대보다도 더 어두컴컴해 보입니다.

얼마전 <그랜 토리노>를 내놓은 79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비교해 봅시다. 이 만년의 걸작에서 이스트우드는 냉소하는 건맨, 폭력 경찰로 살아온 자신의 커리어를 반성하면서 넘어섭니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되, 그것을 끌어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노인의 모습은 이스트우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모든 아기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듯, 모든 노인은 다른 세상을 간직한 채 마지막 숨을 내쉴 겁니다. 이스트우드 같은 현자도 훌륭하지만, 루멧같이 꼬장꼬장한 노인도 필요합니다. 흐릿해지는 시력으로, 뻣뻣해지는 목을 가누면서 이 어두운 세상의 고갱이를 직시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오히려 “좋은 게 좋다”며 세계의 진면목을 회피하는 태도야말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루멧이 형형한 시선을 잃지 않은 채 차기작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