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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양승준 기자] 1. 연극 ‘유도소년’은 올 상반기 발견이었다. ‘X세대’의 문화적 추억과 성장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 극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더불어 평단의 호응까지 챙겼다. 최근 이데일리가 문화계 파워리더 90명을 대상으로 한 창간기획 설문조사에서도 ‘유도소년’은 상반기 연극 가운데 가장 많은 조명을 받았다. 이 작품은 97학번인 이재준 연출, 당시 고교 2학년생이던 박경찬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
2. 지난 5월 연극 ‘챙!’ 인터뷰를 위해 만난 연극계의 거목 이강백(67) 작가는 최근 눈여겨본 작품으로 ‘알리바이 연대기’를 꼽았다. 92학번인 김재엽이 쓰고 연출한 작품이었다. 연극은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1930년생인 아버지와 1974년생인 아들의 삶을 통해 들춰내 지난해 각종상을 휩쓸었다.
70년대생 90년대 학번. 이른바 ‘X세대’라 불린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듣고 ‘접속’으로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즐겼다. 영·미문화뿐 아니라 금지됐던 일본대중문화가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문화적 다양성도 누렸다. 1980년대의 경제적 호황에 문화적 황금기까지 맞은 이들은 개방적이었다. 동시에 ‘경계인’이기도 했다. 앞선 ‘386세대’의 학생운동을 보며 자랐지만 문민정부 시대에 살다 보니 저항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취업을 앞둔 20대에 IMF가 터져 경제적 위기도 동시에 맛봐야 했다. 자유와 다양, 냉소와 불안의 공존. 풍부한 사회·문화적 지층을 쌓은 X세대 창작자들이 얼어붙은 대학로를 녹이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와 문법으로 창작물을 쏟아내며 이끼 낀 무대에 볕이 되고 있어서다.
▶“격앙 않고 차분히 다양하게”…개인·혼동의 역사에 집중=X세대의 혼동적 특징을 잘 끄집어 낸 창작자는 김재엽과 93학번 성기웅 연출이다.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 92학번인 김재엽은 격변의 현대사를 개인사에 비춰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3대의 서로 다른 시각에서 굴절된 역사를 보여준 ‘알리바이연대기’가 대표적. “역사교과서에 없는 개인사가 진짜 역사”라고 믿는 연출의 철학이 깔렸다.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개인에 무게중심이 실리기 시작한 세대가 바로 X세대다.
김재엽은 신작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11월 4~30일 남산예술센터)에서도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현대사와 동시대가 만나는 다양한 시각을 펼쳐 놓는다. 성기웅의 특징은 이야기가 출발하는 시기에서 두드러진다. 성기웅은 1930년대 식민지시대와 경성을 자주 무대에 되살려낸다.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사람들’ ‘소설가 구보씨의 1일’ ‘깃븐우리절믄날’ ‘가모메’ 등이 모두 그렇다.
1930년대는 근대와 전근대가 만나고, 서구문화와 전통가치가 충돌하는 격변의 시대였다. 냉전의 종말로 세계화가 급속하게 추진된 1990년대 상황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다만 이 시기를 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김재엽은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얘기한다. 성기웅도 혼동 속 균열을 잔잔하게 펼친다. 황두진 서울예대 교수는 “격앙된 386세대와 달리 X세대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냉소적인 부분이 있다”며 “이런 세대적 특징들이 두 사람의 작품에 드러나는 것 같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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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동은 “이미지가 언어인 시대에서 그 변화를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뮤직비디오 세대라 불리는 X세대인 만큼 이들이 누린 시각적 풍요는 다양하게 무대에 펼쳐진다. X세대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는 연극의 고정적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무대 뒤에 세우는 벽 같은 특정한 세트도 쓰지 않는다. ‘죽음과 소녀’(11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는 동명 희곡 중 3개 장면만 따 60분으로 압축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치장과 격식을 빼고 배우를 위해 무대를 단순화하는 게 이들의 제작 방향이다. 현수정 공연평론가는 “권위의식이 없어 그만큼 내면의 소리와 일상의 관찰 등에 귀 기울여 사실주의 표현에 탁월한 게 바로 X세대 창작자들”이라고 평가했다.
▶숨겨진 1cm=김재엽은 X세대 이야기를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에서도 다뤘다. 1990년대 초반 대학 생활을 해 정치적, 경제적 과도기에 태어난 ‘낀 세대’의 추억과 회한을 얘기했다. 2000년대 초반 문을 닫은 신촌의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 ‘오늘의 책’을 배경으로 인문학의 위기를 고민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유학을 다녀온 성기웅은 일본 작품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히라타 오리자의 ‘과학하는 마음’ 등을 국내에 처음 선보였고, 최근 국내에 공연된 ‘가모메’ ‘반신’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김재엽과 성기웅은 연대 국문학과 선후배 사이로 학내 극회 창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조선형사 홍윤식’에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