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그러나 누가 뭐래도 비자나무다. 비자림 관리사무소 임덕기씨가 "누가 일일이 광내서 닦은 것 같다"고 말했듯 이 곳 나무들은 반짝반짝 귀티가 흐른다.
삶은 그러나 이들에게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알고 보면 이들에게도 '사연'이 많다. 어떤 녀석은 벼락을 맞고도 견뎠고, 어떤 녀석은 이웃 나무와 싸우다 지친 끝에 사랑에 빠졌다.
'궁궐의 우리 나무' 저자 박상진 경북대 교수는 "비자나무를 보면 삶은 견뎌서 얻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비자나무 숲에서 인생의 교훈을 들어봤다.
■ 봄은 견뎌야 온다
숲 초입에 서 있는 비자나무는 반만 남았다. 몸뚱이엔 검게 불탄 흔적이 뚜렷하다. '벼락맞은 나무'라고들 부른다.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벼락이 이 나무를 후려친 적이 있었다.
나무는 절반은 죽고 나머지 반이 살았다. 나무가 수분이 많고 재질이 균일하면 벼락이 순식간에 저항 없이 통과해 버린다는데, 이 나무 중 썩지 않고 옹이도 없었던 뒷부분이 그렇게 벼락을 흡수하고도 멀쩡하게 남은 것이다. 대신 앞부분은 전기가 제대로 통과하지 못해 모두 타버렸다. 박상진 교수는 "이 나무를 볼 때마다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치고 상처 받은 인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나무가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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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사랑도 전쟁의 흔적일까. 숲 중간쯤엔 연리목(連理木)이 있다. 흔히들 두 나무가 맞닿아 하나로 붙어버린 연리목을 두고 '사랑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나무는 합쳐지는 과정에서 서로를 압박하고 싸운다. 이웃한 두 나무가 굵어져 맞닿으면, 서로 나이테를 만들기 위해 부딪히고 밀어낸다. 끝내 맨 살의 껍질이 파괴된다. 나무의 자람을 담당하는 '부름켜'가 이 때 서로 가진 물질을 주고 받으면서 방사조직이 섞여버린다. 세포벽이 이어지는 것이다. "부부도 하나가 되려면 죽도록 싸워야 하니까…"라고 임덕기씨가 추임새를 넣었다. 어찌됐건 하나가 된 나무는 지금 행복한 모양이다. 봄 햇살을 받으며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까.
더 걸어가면 줄기에서 뿌리를 내린 비자나무도 볼 수 있다. 숲의 반환점에 서 있는 이 비자나무는 몸의 일부가 썩어버렸다. 나무는 살고 싶었을 것이다. 몸 속 비상용으로 숨겨둔 뿌리 눈이 갑자기 활동을 재개했고, 땅 위 2m 가량 올라가 있는 줄기에서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잔뿌리는 땅까지 닿았고, 나무는 썩은 몸통으로 꿋꿋하게 아직 살아간다.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제주도의 비자나무들이 왜 귀족처럼 기품이 넘치는지를. "삶의 기품은 결국 고난을 어떻게 버티느냐에 달려 있잖아요." 박 교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비자나무의 봄은 겨울을 견디고 버티며 나무들이 얻어낸 아름다운 보상이 아닐까. 숲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이 비누방울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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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열한 비자나무 생존기
비자 잎은 꼭 한자 '아닐 비(非)'처럼 생겼다. 가지를 가운데 두고 뾰족하게 좌우로 자란다. 이 '비(非)' 앞에 상자나 가구를 만들기 좋다는 뜻으로 상자(?)를 표시하는 부수를 붙여주고 나무 목(木)을 붙였더니 오늘날의 '비(榧)'자가 됐다는 설이 있다. 잎의 수명은 6~7년, 때론 10년이 넘어 잎이 가장 오래 사는 나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주도 구좌읍 비자나무 숲은 이 나무 2000여 그루가 44만8156㎡의 땅 위에서 자라나는 천연림이다. 나무들이 많다 보니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박 교수가 숲 사이를 걸어가다가 짐짓 모른 척 하며 "웬 닭갈비 뼈가 여기 있나…"라고 말을 걸었다. "어머, 이게 뭐죠?" "뼈예요. 비자나무 뼈."
농담이다. 이건 비자나무 가지들이다. 햇빛을 찾기 위해 서로 팔을 뻗다가 부딪힌 가지들은 싸움 끝에 떨어져 내린다. 축축한 가지들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썩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껍질이 먼저 썩어 떨어지면, 꼭 뼈처럼 생긴 가지의 고갱이만 남는다. 이게 꼭 닭 뼈다귀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는 건 역시 전쟁이라니까…." 박 교수가 웃었다.
■ 어머니처럼 늙었네… 머귀나무
비자나무 숲에서 함께 자라는 나무들도 많다. 완도에서 헤죽헤죽 웃던 머귀나무도 이 곳에서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수피가 눈에 들어온다. "왜 이리 울퉁불퉁한가요?" "아 그건 가시예요."
머귀나무는 몸통 위에 가시를 숱하게 달고 있는데, 대부분 그 끝이 뭉그러져 있어 꼭 봉분(封墳)같다. 옛날 사람들은 이 가시를 두고 "늙은 어머니의 젖가슴 같다"고 했다고 한다. "엄마 젖이 아기들에겐 곧 '먹이'니까 먹이나무라고 부르다가 머귀나무가 된 것 아닐까요?" 임덕기씨의 추측이 그럴싸했다.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고 남은 늙은 어머니의 가슴 같은 나무…, 어쩐지 짠하고 애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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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얽히고 설켜 함께 자란다, 덩굴식물
비자나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온갖 덩굴식물을 장식처럼 몸에 감고 자라난다. 생명력이 강한 비자나무, 덩굴식물들은 강한 나무를 감싸고 올라타며 '공생'을 꾀한다. 대표적인 녀석이 콩짜개란. 꼭 콩알이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처럼 생긴 난초과 식물이다.
마삭줄도 많다. 줄처럼 길게 늘어져 자라는 늘푸른잎 덩굴 나무다. 삼으로 꼰 밧줄 같다고 해서 마삭(麻索)이다. 줄기·잎이 열 내리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예전엔 한약재로도 쓰였다.
■ 심으면 걱정 없어지는 나무… 비누 대신 쓰세요
비자나무 숲엔 비누나 향수로 쓰이는 나무도 있었다. 무환자나무(無患者)가 대표적이다. '환자가 안 생기는 나무'라는 이름은 옛날 중국에서 이름난 무당이 이 나뭇가지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됐단다. 무환자나무의 영어 이름은 '소프베리(soapberry tree)'. 열매껍질이나 가지, 속껍질에 사포닌이라는 성분의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어서 인도에선 이 나무를 빨래하는데 비누처럼 썼다고 한다.
곳곳에서 자라는 생달나무도 목욕탕의 향료로 애용되는 나무다. 영어 이름은 시나몬 나무(cinamon tree). 잎을 비비면 향긋한 계피향기가 나서 예전엔 향수 대신 쓰였던 모양이다.
■ 봄은 덧나무에서 핀다
숲을 한 바퀴를 돌아 연둣빛 새순을 온 몸에 달고 선 덧나무를 만났다. "비자나무 숲에선 가장 빨리 봄을 알리는 나무"라는 것이 임씨의 설명이다. 성급한 꽃눈이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봄바람이 불자 덧나무 가지도 덩달아 춤을 춘다.
덧나무 바로 아래엔 자금우(紫金牛)가 빨갛게 열렸다. '자줏빛 금송아지'라는 이름이 조금 생뚱맞지만 초록빛 잎 사이로 콩알만한 빨간 열매를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숲을 다 돌고 나가는 길, 임씨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여기 수선화도 피었네요…."
이슬에 젖은 수선화가 비자나무 아래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나무들이 견뎌온 세월의 그늘 아래 핀 노란 수선화, 봄은 그렇게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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