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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주는 식당 부담, 고기도 덜 먹어"…힘겨운 인플레 나기[미국은 지금]

김정남 기자I 2022.06.12 14:34:06

1970~80년대 초인플레 덮친 미국
치솟는 기름·점심값에 시달리는 출퇴근족
식품가격 폭등…고기 덜 먹고 냉동채소 사
기업은 제품 용량 축소 '슈링크플레이션'
인플레에 소비심리 최악으로…스태그 전조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월가의 한 뮤추얼펀드에서 일하는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일하는 H씨. 그는 거의 1년 전부터 자신의 차로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에서 뉴욕시 맨해튼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회사가 월 700달러(약 90만원)가 넘는 시내 주차비를 지원해주는 덕에 부담은 덜하지만, 올해 들어 고민이 생겼다. 기름값이 폭등하면서 운전하는데 비용이 급증한 것이다. 그가 주로 찾는 동네 주유소에서 11일(현지시간) 기준 보통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1갤런=3.785리터) 5.09달러였다. 13갤런 정도 넣어야 하는 차량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면 70달러 가까이 된다. G씨는 “예전보다 2배는 올랐다”며 “시간이 더 걸려도 버스를 타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전미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이날 기준 미국 전역의 보통 휘발유 평균가는 갤런당 5.004달러다. 1년 전(갤런당 3.077달러)보다 62.63% 치솟았다. 뉴저지주의 경우 5.054달러다. ‘기름이 물보다 싸다는’ 미국이 맞나 싶을 정도다.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대 고공행진을 하면서 일상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JP모건체이스는 8월께 6.20달러를 점치는 등 휘발유 가격은 추가 상승 가능성이 높다.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의 한 주유소에 보통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5.75달러(신용카드 기준)로 적혀 있다. (사진=AFP 제공)


집 안팎서 모두 힘겨운 한 끼 식사

G씨의 또다른 고민은 점심이다. 요즘 맨해튼 직장인들 사이에는 ‘런치플레이션’(lunchflation)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가볍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샐러드, 샌드위치, 트럭 간편식 등의 가격이 모두 올라서다. 식당에서 줘야 하는 팁은 암묵적으로 음식값의 20% 이상이다. 인플레이션 충격에 식당 운영이 어려우니, 15%의 팁은 눈치가 보일 정도다. G씨는 “사무실 출근 자체의 부담이 커졌다”고 했다.



1970~1980년대 오일쇼크급 초인플레이션이 미국의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6%를 기록했다. 1981년 12월(8.9%) 이후 거의 41년 만의 최고치다.

물가 충격은 G씨 같은 출퇴근족뿐 아니다. 미국 가정의 식탁마저 바꾸고 있다. CNBC에 따르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재무설계사로 일하는 브라운씨는 몇 달 전부터 요리할 때 고기 양을 줄이고 있다. 그는 “볶음요리(stir-fry dinners)를 할 때 고기를 예전의 절반만 쓴다”며 “그래야 식료품 지출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브라운씨의 사정은 물가 통계로 나와 있다. 5월 CPI 보고서에서 고기 가격은 1년 전보다 12.3% 뛰었다. 볶음요리에 자주 쓰이는 소고기 다짐육은 13.6% 올랐다. 이외에 △베이컨(15.3%), 소시지(16.0%), 햄(11.1%) 등 돼지고기류 △생닭 한마리(14.7%), 생닭 부분육(19.3%) 등 닭고기류 △신선 생선·해산물(13.1%), 냉동 생선·해산물(14.0%) 등 해산물류는 모두 두자릿수 이상 상승했다. 외식 물가(7.4%)가 상대적으로 주춤한 사이 집에서 해먹는 식재료 가격이 폭등했다.

14세·15세 두 자녀와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사는 존슨씨는 “전에는 집에서 닭고기를 많이 먹었다”며 “이제는 덜 비싼 햄버거로 대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신선 채소 대신 냉동 채소를 사고 있다”고 토로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해리스의 애비 러니 매니징디렉터는 “여론조사를 보면 인플레이션에 대한 가장 큰 우려로 식료품이 꼽혔다”고 말했다. 미국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3월 18~23일, 5월 6~8일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한 결과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에 위치한 한 식료품점에 각종 과일들의 가격이 붙어 있다. (사진=AFP 제공)


기업들 ‘슈링크플레이션’ 고육지책

기업이라고 고충이 없는 게 아니다. 인플레이션 탓에 생산비 증가에 직면하면서, 가격을 올리는 대신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으로 대응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가격이 오르는 것과 같다. AP통신에 따르면 화장지 브랜드인 크리넥스는 한 달 전만 해도 작은 상자 하나에 65장의 티슈를 담았지만, 이를 60장으로 축소했다.

가격 인상 움직임도 있다. 식품업체 크래프트하인즈는 최근 유통 고객사들에게 클래시코 파스타 소스, 맥스웰하우스 커피 등의 가격을 8월부터 인상하겠다고 통보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문제는 이같은 물가 폭등이 경기 침체로 이어지며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시간대가 내놓은 6월 소비자태도지수 예비치는 50.2로 떨어졌다. 1978년 집계 이래 사상 최저다. 인플레이션 고공행진에 소비심리가 점차 악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기업 경영 역시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의 전조다.

블리클리 어드바이저리그룹의 피터 부크바르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올해 3분기 경기 침체가 시작돼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면서 “침체의 초기 단계에 있다”고 경고했다. 마이클 하트넷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수석투자전략가는 “이미 침체 국면에 들어섰지만 단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화장지 브랜드인 크리넥스가 작은 상자 하나에 담는 티슈 수를 65장에서 60장으로 줄였다. (출처=AP통신, 뉴욕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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