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위기를 즐겨라`..주목받는 리더십

이학선 기자I 2008.05.23 11:04:51

(제7부)기업 리더십에서 배운다
SK그룹, 오너·이사회 화학적 결합으로 시너지
포스코·KT, 부드러운 카리스마..시험대 오른 삼성 리더십

[이데일리 이학선기자] 경영환경이 변하면서 리더의 역할도 크게 바뀌고 있다. 특히 경제성장과 사회변화 속도가 빨랐던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게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다양한 리더십이 기업성장을 견인해왔다. 
 
최고경영자(CEO)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경영체제와 지배구조에 적합한 리더십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이를 통해 회사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기도 했고, 실패의 나락으로 빠지기도 했다. 리더십으로 통칭되는 이들의 언행에는 그래서 단순한 말 한마디, 행동 이상의 의미가 담긴다. 
 
◇'깐깐한 사외이사 모셨더니'..SK그룹의 파격

지난해 6월 SK텔레콤 이사회. 비메모리반도체 설계 전문회사인 에이디칩스 인수 안건이 올라왔다. 칩 설계역량을 갖춘 이 회사를 인수해 멀티미디어 환경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안건은 부결됐다. 사전에 충분한 협의없이 인수건을 진행, 사외이사들의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사외이사들의 반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SK텔레콤 사외이사가 어떤 권한을 쥐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례로 회자된다.

흔히들 '거수기'로 불리는 사외이사를 SK그룹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던 당시 그룹 모회사인 SK는 이사회의 70% 이상을 사외이사로 채우겠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파격은 SK그룹을 한단계 도약시키는 발판이 됐다. 의사결정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해 대외신뢰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투명경영하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없이 SK그룹을 꼽을 정도다.
 
▲ 올해초 그룹방송 `2008년 SK, 회장에게 듣는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태원 회장.
"팔소매 걷어붙이고 화이트보드에 그림 그려가며 상대를 설득하는 오너 봤습니까?"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을 묻자 SK그룹 고위관계자가 내놓은 답변이다. 흔히 오너라고 하면 책상에 앉아 서류에 사인이나 하고 지시만 내리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임원회의나 이사회 등에서 오너가 아닌 회의의 한 구성원으로 참석한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상대와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주력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직접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 참석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오너'라는 계급장을 떼고 설득력과 비전, 전략제시 능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위기가 리더를 키운다 

최 회장의 이런 능력은 SK글로벌 사태를 겪으면서 세련되게 가다듬어졌다. SK그룹은 지난 2003년 SK글로벌 사태로 그룹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있었다. 소버린으로부터 퇴진요구까지 받던 최 회장은 이듬해 이사회 중심의 경영체제를 구축하겠다는 해법으로 위기를 정면돌파했다.

사실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는 오너로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오너가 결정하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는 사업도 일일이 사외이사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외이사를 통해 까다로운 검증작업을 마친 뒤에는 오너 중심회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만큼 사업추진에 힘이 실린다.

"처음에 이사회 중심 경영을 하겠다니까 다른 기업들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니들이 그렇게 하면 우리는 뭐가 되냐는 식이었죠. 하지만 지금 많은 기업이 이사회 중심경영을 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죠. 또 투자자나 소비자들로부터 투명한 기업이라고 신뢰를 얻으면 경영성과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SK그룹 관계자는 이사회 중심 경영의 성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 SK그룹은 지난해 매출 78조원과 수출 250억달러를 돌파하는 등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 이사회 중심구조와 최 회장이라는 오너가 화학적으로 결합해 만들어 낸 성과라는 평이다.
 
◇견제와 균형 갖춘 포스코·KT

SK그룹이 오너와 이사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형태라면 포스코와 KT는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조화를 이룬 사례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최고경영자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과 달리 이 두 회사는 사장직과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해놓고 있다. 회사를 경영하는 전문경영인과 주주권익을 대변하는 이사회가 균형을 이룬 모양새다.
 
오너가 없다보니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마찰을 빚을 경우 해법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다행스럽게 그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두터운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포스코의 경우 사외이사 3명, 사내이사 1명이 이사회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 대표이사 등 상임이사를 추천한다. KT는 사외이사 전원과 전직 사장, 민간위원 등 9명이 참여하는 사장추천위원회가 추천권한을 갖고 있다. 추천단계부터 사외이사들이 참여해 전문경영인과 이사회의 마찰 가능성을 사전에 줄여준다.
 
▲ 포스코와 KT는 전문경영인과 이사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이 이구택 포스코 회장, 오른쪽이 남중수 KT 사장.


전문경영인의 장점은 무엇보다 해당산업을 꿰차고 있다는데 있다.미래의 먹거리를 위해 투자해야할 분야가 무엇인지 술술 나온다.
 
포스코 공채 1기 출신인 이구택 회장은 세계 철강역사에 유례 없는 '파이넥스 공법'을 상용화하는 저력을 보여줬고 남중수 KT 사장은 와이브로와 IPTV 등 새로운 서비스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회장과 남 사장은 둘다 '외유내강', '부드러운 카리스마' 등의 이미지를 지녔다. 잘못했다고 부하직원들을 몰아붙이기보다는 실패를 두려워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식으로 동기를 부여한다. 꾸중보다 칭찬이 더 큰 힘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험대 오른 삼성..'이건희 대신할 리더십 찾아라'

삼성그룹은 그간 오너와 전문경영인, 그리고 그룹의 심장부로 불리는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조를 유지해왔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판단과 결정이 경영에 큰 몫을 차지해왔다.  

한국이 세계 최고수준의 반도체 수출국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회장의 결단이 큰 영향을 미쳤다. 누구도 성공 여부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회장이 승부수를 던져 삼성그룹을 재계 1위 업체로 키운 것이다. 그는 지난 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한다"며 그룹 전체의 혁신을 주문하기도 했다. 

삼성은 이제 이 회장이 퇴진하고 전략기획실이 헤채를 눈 앞에 두면서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계열사들은 이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각자 독립경영을 해야 한다. 이재용 전무는 신흥시장을 개척에 투입돼 경영수업과 함께 능력검증을 다시 거쳐 삼성 후계자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숙제를 짊어졌다.  
 
그룹 전체가 이 회장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대신할 새로운 리더십을 찾아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여러 공과가 있지만, 이 회장은 존재 자체로 삼성에 큰 힘이 됐던 게 사실"이라며 "그의 부재를 메워줄 수 있는 인물과 조직을 얼마나 빨리 갖추느냐에 따라 삼성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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